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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Sep 27. 2022

고슴도치 딜레마

대인관계에 매달려 사는 모습

    우리는 흔히 정 때문에 산다는 말을 많이 한다. 가족이나 친구, 관계의 정을 먹고사는 게 현실이다. 관계 사이에 있는 정을 떼어내는 행위를 '정 떼기'라 하는데, 죽음을 앞둔 사람이 평소와 달리 구는 행동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이 견디기 어려운 것을 알고 정을 떨어지게 하여 미리 뿌리치는 행동이다. 이별로 인한 죽음을 정 떼기에 비유할 정도로 사람 사이의 정은 생존 에너지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누군가의 정을 그리워하고 누군가의 정에 기대 살고 있는 것이다.


   홀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본능적 욕구를 실현하는 연결고리가 정이기도 하다. 이기적 존재들이 서로 연대감으로 생존하기 위한 방식인 것이다. 혈연 학연 지연 등 인연을 중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기대고 의지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젊을 땐 폭넓은 대로 같은 대인관계였다면 나이가 들면 골목길처럼 인간관계로 줄어든다. 소수 한정된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는 모습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삶의 에너지도 줄어드는 모습이다. 관계의 정 떼기 자연스럽게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일상이 지치고 무기력해질 때가 있다. 내 마음을 진심으로 알아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일에 몰두하고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기뻐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허탈해진다. 관계 속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잊고 지내다가 혼자 외톨이라는 생각이 들면 공허해진다. 소외로 인한 외로움처럼 삶이 허탈하고 슬프질 때도 없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생존 본능이라 할 수 있다. 내 곁에 언제나 누군가 함께 해야 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인정 욕구가 거절되거나 무시당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부모와 애착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어린아이에게 부모와 분리 불안은 충격이다. 학교에서 왕따를 터부시 하는 것도 관계로부터의 소외로 인한 상처가 심각한 정신질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독방 감옥 생활을 가장 참혹한 형벌로 취급하는 것도 생존 본능을 거슬리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사회 울타리 생활을 전제한 생존 본능을 지닌 존재에게 무리를 떠난 소외된 삶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한다.


   가정과 사회 울타리 생활을 하는 존재에게 정은 서로를 연결시키는 끈과 같다. 추울 때 서로의 체온을 유지시킬 수 있고 외로울 때 든든한 버팀목으로 기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언가다.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고 성장을 돕는 것이나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자식의 마음이 그것이다. 아이가 부모한테 분리 불안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친구 사이 소외가 싫은 것도 서로의 정 없인 살 수 어렵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반면에 삶이 고통이고 불행으로 여겨지는 근원에도 관계의 '정' 때문이다. 


   애틋하게 아끼고 사랑으로 키운 자식이 독립하면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서운한 감정이 든다. 성인이 되어 자립하여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유아적 애착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유착관계에 질질 이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믿고 의지하던 가족관계가 실망과 좌절로 인한 애증관계로 변해 불평불만에 빠진 사람도 적지 않다. 서로 다른 편향된 사고와 생각, 이기적 성향과 충동으로 사는 존재끼리 갈등과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다. 항상 따스한 온정과 서로를 위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사람과 관계 속에서 관계의 정을 느끼며 살기 때문에 인생이 고달픈 것이 아닌가 싶다. 기준도 한계도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이 정이다. 마음속 감정이다. 상황에 따라 수리로 변하고 사람마다 편차가 심하기도 하다. 애초부터 마음에 쏙 드는 타인이란 기대할 수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친하고 좋아하던 상대와도 유효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 마음의 정이다. 쉽게 질리고 변하기 쉬운 것이 변덕스러운 감정이다. 일 때문에 삶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 때문에 지난한 삶이다. 


    지난 내 삶도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과 열정으로 점철시켜 볼 수 있다. 인간관계 강박증에 빠져 살지 않았나 싶다. 평소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상의 강박증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 나를 아는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나를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사람과 마주하는 생활이 참을 수 없는 고통처럼 의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인관계 강박증에 빠져 살면서 정작 소중한 가족들에게 감정 소비를 소홀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매력 없는 존재였다. 매력 있는 존재였다면 타인의 마음을 사려고 열정을 쏟는 일에 전전긍긍하지 않았을 터이다. 남들에게 주목받고 존경받기 위해 남들 시선에 그리 매달려 살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허약한 자존감을 타자의 눈치로 채우는 부질없는 존재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스스로 살아가는 실속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대인관계가 소중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르칠까 조바심을 느끼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까진 없다는 얘기다.


   미친놈 질량 법칙은 어디에서나 예외가 없는 일이다. 상사나 동료 사이 상대를 무시하고 폭력적 언행을 일삼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닦달하는 상사가 있는가 하면 비열한 방식으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약삭빠른 사람은 어딜 가나 있다. 엄밀히 말해 현실사회는 양심이나 자존감 따위는 숨겨 놓고 지내야 생존이 유리한 경쟁사회라 할 수 있다. 양보와 배려를 미덕으로 알고 살던 세상이 경쟁으로 사는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믿고 따를만한 평등한 공동 질서가 없다면 각자도생 하는 수밖에 없질 않은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되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상처받지 않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인정 욕구에 매달려 인정 많은 큰 아기가 눈물 마를 날이 없다는 말처럼 삶을 허비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인생을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선 상에 놓고 본다면 상당수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관계가 중요하다고 관계 조급증에 빠질 필요가 없단 얘기다. 관계의 좌절이나 상처를 굳이 자신 탓으로 돌려 자책까지 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가 고슴도치 딜레마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사람 관계에 있어,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은 욕구도 공존한다. 서로 부딪치고 살맛을 느끼고 싶으면서 프라이버시는 보장받고 싶은 모순적인 심리를 갖고 있다. 관계로 인한 불평불만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까닭이다. 인간관계의 애착을 느끼면서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선을 그을 줄 아는 지혜야말로 삶에 꼭 요구되는 역량이 아닐까 한다.

    

    시중에 인문 서적은 넘치나지만 미성숙한 관계로 인한 고통을 지혜롭게 풀어가는 소양은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은 것도 한몫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국영수는 배우지만 인문 소양 교육에서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욕구, 다양한 기호와 취향을 갖는 사람끼리 서로 부딪치고 충돌을 해소하는 노력은 소홀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보다 '우리'를 강조하고 관계를 중시하지만 좌우와 영호남으로 편 가르고, 빈부나 남녀 갈라 치기가 만연하여 심각한 사회문제로 갈등을 키워도 해결책을 고민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내 편이 아닌 상대 편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차별과 무시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 골치를 앓아야 하는 것도 관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적자생존의 자유 경쟁 사고가 삶의 원칙 양 인식하여 차별과 멸시가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당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 삶이 고귀한 것처럼 동등한 인격체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평등 마인드가 고취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변하기 어렵다. 외롭고 고독한 삶이 힘들어 죽음을 선택한 노인 자살률 세계 1위 불명예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언제나 내 편이고 보듬어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이기적 인간으로서 공짜가 없는 세상에 살면서 조건 없이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부모밖에 없다. 부모와 함께 산다는 사실만큼 행운아도 없다는 생각이다. 부모님이 안 계신 빈자리는 든든한 기둥이 없어진 만큼이나 기운이 빠지고 허전하다. 더 자주 찾아뵙고 더 많이 해드리지 못한 미안함으로 채워지고 만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는 과거 부모의 애착에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맴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정과 학교교육부터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두뇌계발과 지식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존엄한  인간을 대하는 내면 의식부터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교육이다. 특히 아이의 미래는 가정교육에서 이미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육자의 일방적인 보호와 사랑에 의존하는 영유아 시절에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의 양육 태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마음(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뿐 기분이 좋으면 웃고 즐거워하며, 기분이 나쁘면 울며 화를 낸다. 생존을 위한 욕구를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아이의 본능적 욕구인 불쾌 감정을 부모의 판단과 평가로 무시하거나 억압하려는 훈육은 아이를 망치는 일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공격에 대한 아이의 방어능력을 꺾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감정은 쉽게 변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감정의 원인을 찾아 공감해주고 감정 해소를 기다려주는 태도가 아이 교육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존감에 모욕을 느껴 힘든 게 인생이다. 어렵고 힘들 때 함께 아파하고 슬퍼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내 삶을 성공한 삶이 아닐까. 언제나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과 함께 사는 삶이라면 살맛 나는 삶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부모가 그런 사람이다. 삶에 의욕이 떨어져 죽고 싶을 만큼 속상하고 마음을 아파해도 내 편인 사람은 부모가 아닐까 한다. 나를 끔찍이 아끼던 그런 존재가 떠나가셨기에 부모님이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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