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길성 Oct 15. 2022

무지의 자유

모르는 약과 아는 힘

     얼마 전 둘째 딸이 임신했다는 말에 탄성이 절로 났다. 그동안 침묵하며 기다리던 손주 소식이었기에 너무 반가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큰 아이 손자 손녀가 이미 있는 터라 손주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또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자식과 손주는 사랑에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내가 할아버지가 된다는 느낌은 아빠가 되었을 때와 느낌과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탄생에 안도의 고마운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손주를 맞은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감 분위기는 비슷하다. 평소 무뚝뚝한 친구가 손주를 보니 그리 예쁠 수가 없다 하고, 손주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는 말도 들을 수 있다. 살만큼 인생을 살았다 싶으면 욕구도 미련도 줄어야 할 것 같다. 탐욕스런 생활과 자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고 생에 대한 애착도 약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여유를 갖고 느긋한 삶을 사는 지혜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함께 살다 먼저 떠나보낸 이들이 많다. 그들과 영원한 작별을 애도할 때마다 내가 다짐했던 마음이 "초연하게 살자"였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쉽지 않다. 떠난 사람을 상기할수록 잊히지 않는다. 꿈 속에 가끔 나타나 현실과 구분 못하게 하기도 한다. 아는 게 병이라는 말처럼 생에 집착을 갖게 만드는 것이 죽음이 아닌가 싶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상상이 두려움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죽음은 세월이 주는 변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를 살고 있는 한 쓸데없는 상상에 불과한 것이 죽음이다.


   나 역시 그랬지만 젊은 세대들의 육아에 불만족을 느낀다. 아이의 탄생은 존엄한 생명체의 등장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일이다. 낳기만 하면 생존력에 기대 살아남던 시절과 다르다. 인격체로 성장을 돕는 육아는 고도의 전문 영역으로 위대하고 숭고한 일이다. 수년에 걸쳐 온갖 사랑과 정성, 희생과 노력이 요구되는 무엇보다 소중한 분야이기도하다. 생계와 병행해야한다는 구실로 닥달하는 육아가 아닌가 싶다. 식물에 비료를 뿌리는 것처럼 발육을 서두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평온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 초연함이 느껴진다. 과거의 기억이 비어있는 무지의 자유에서 비롯된 일이다. 과거에서 비롯된 기억에 의해 인간이 두려움과 고통을 겪는 격이다. 어린아이가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본질에 충실하며 의젓한 까닭이다. 따져보면 생사는 의식과 무관한 일이다. 심장이 뛰고 숨 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현존과 상관없는 괜한 공포가 죽음이다. 어린아이 모습이 그러하듯 죽음의 무지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면 족한 것이다. 


   건강을 위해 적당한 운동과 맛있는 음식을 챙겨 먹으면 그만이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무의식 영역에서 대부분 책임을 질 뿐이다. 자아는 무의식 영역을 믿고 의존하면서 현재의 건강한 삶을 누리면 된다. 나이가 들면 노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과 마음의 쇠퇴로 인한 질환임에도 굳이 건강 염려증으로 사서 고초를 겪어야 필요가 있을까. 아는 걸 병으로 사서 할 필요가 없지 싶다. 죽음을 공포로 여겨 스스로 불안을 떠안고 살 필요가 없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삶의 한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잠재의식에는 종족 본능이 방어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종족 유지에 관한 본능이 숨어있어서 허전 인생을 달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자식에 이은 손주에 대한 각별한 사랑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손주가 세상에 태어나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끼던 감회가 그런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내리사랑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온도 차이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말이다. 


    손주에 대한 각별한 감회와 달리 경이로움도 있지 않았나 싶다. 다름 아닌 '자아에 대한 인식'이다. 인생을 살면서 나 자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세계를 손주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손주의 존재가 그러하듯 누구나 사랑과 축복으로 태어난 귀중한 존재였다. '아이 꽃이 가장 예쁘다'는 말처럼 마음을 녹일 만큼 따스한 에너지를 지녔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이 그런 존재였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자아의 근원이나 본질조차 알지 못한 채 그동안 살아온 셈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가장 소중한 존재로 태어나 존귀한 삶을 영위해야 마땅하다. 존엄한 인격체로서 자부와 긍지를 갖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 현실 사회를 살고 있는 자아로서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무지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음이 분명한데도 주체자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성공과 성취를 목표로 인생을 산 셈이다. 손주를 보면서 그런 자아를 뒤늦게 발견하고 그리워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인생이 공허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졌던 까닭도 쾌락이나 욕망을 쫓아 남들과 경쟁하며 살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떻게 살지 고민할 겨를이나 여유도 없이 살아온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살아진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남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흉내 내면서 살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이나 원리, 질서와 규범, 경험을 도구로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토록 존엄한 존재이고 훌륭한 존재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무지한 존재로서 삶에 불과하는 생각이 든다. 


    무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사는 방식이 자아를 깨닫는 삶이 아닐까.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지를 스스로 깨닫는 것을 사는 목표 내지 방향으로 삼아야 하지 아닐까.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성현들의 가르침이나 진화 문명을 전수받으며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답을 찾는 것을 교육으로 안다. 자아실현이 아닌 생존 도구에 매달린 교육에 치중하고 의존한다. 개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에 필요한 깨달음은 교육이 외면한다. '아는 게 병'이 되는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그 때문이 아닐까.


    모르는 약만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아는 힘도 반드시 필요한 지식도 있다. 맹수의 독이나 독초의 해로움을 모르면 생존이 위태롭다. 불의와 악으로부터 생존을 지키는 지식이나 경험은 생존에 꼭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한다. 몸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생명이 위험하고 마음의 상처를 무시하면 화가 되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데 필요한 힘은 길러야 한다. 통증을 느끼고 질병을 치유하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경험은 지혜로운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


     가까운 직장 상사나 친한 친구,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삶이 기쁘고 행복한 일도 있지만 상처받고 짜증 나는 일은 필연적이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거나 기대가 무너졌을 때 절망으로 화가 나는 원인이다. 유권자로서 의무를 다했어도 대통령이 민의를 수렴하지 않고 민생을 외면했기에 실망하여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인사와 무시당하는 외교 참사, 거짓과 무능의 실체를 모른다면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선택이 낳은 비극이 아닐까 한다.


   무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살고 있는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 볼 줄 모르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애초부터 서로 갈등과 충돌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사로 다른 가치와 취향에 따라 살기에 부딪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눈과 귀, 코와 입, 피부는 신체 감각을 입출력하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사는데 필요한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뇌가 한다. 눈과 귀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뇌에 기억된 이미지에 의지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는 만큼 세상을 바라보고 산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음에도 편견을 고집하며 사는 존재이기에 무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과거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에 갇혀 편향된 사고에 사는 존재에 불과하다. 쾌락과 고통에서 꼼짝없이 지배당하며 살아온 지난 삶이 그랬던 것 같다. 헤어진 수많은 지인들이 더 이상 그립지 않고 서운한 감정이 앞서는 걸 보면 위선자로 살아온 삶이 한탄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현실 사회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이 아닐까 한다. 미숙하고 어리석은 자아 때문이다.


    손주들에게 삶의 갈등은 바깥 세계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에 있다는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욕구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을 건 걸러내는 유연한 자아 울타리를 쌓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설파한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고슴도치 딜레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