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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Nov 12. 2022

어떤 할아버지로 살고 있나

손자 사랑만큼 행복한 삶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어릴 때 육백을 좋아했다. 화투놀이 상대는 늘 외할머니였다. 바닥에 8장 깔고 8장씩 나눠 갖고 둘이 하는 게임이 육백인데, 고스톱이 대중화되기 전에 주로 하던 게임이 육백 아니면 민화투였다. 한일 합방이 되던 해에 태어나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외할머니는 화투 문화가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됐음을 말해주는 산증인이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화투를 배워 할머니 댁에만 가면 으레 화투를 가지고 놀았다. 지금도 아버지 몰래 외할머니와 함께 즐기던 화투놀이가 그립다.


    아버지는 화투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다. 할머니와 심심풀이로 하던 화투게임조차 훼방을 놓았다. 일제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화투놀이를 경멸하는 수준이었다. 화투를 좋아하던 할머니와 다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를 섞어 언쟁을 벌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논쟁은 끝나지 않았던 것 같다. 두 분이 싸울 때면 나는 할머니 편에 섰다. 내게 할머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를 정말 아껴주고 컸을 땐 내게 기대 살고 싶어 했던 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 되면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갔다. 용인에 살던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나는 언제나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기특한 손주가 왔다고 자랑하며 우쭐대던 할머니 허세는 민망할 정도였다. 덕분에 동네 어르신들이 가져다준 옥수수며 감자와 참외, 수박 등으로 내 배는 호강을 누렸다. 어렸을 때부터 식탐이 유별나던 내가 할머니를 좋아하고 따랐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외할머니는 일생을 외롭게 살았던 분이다. 외할아버지와 헤어져 30년 동안 홀로 지낸 분이었다. 


    그런 외할머니를 안쓰럽게 생각하며 그리워하던 어머니는 글을 배우지 않았다. 할머니와 내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로 지냈던 까닭이다. 어머니 마음을 편지에 대신 적어 보내는 대필가였던 셈이다. 군대 생활을 할 때까지 할머니와 위문편지를 주고받았다. 할머니를 편지를 받으면 반가운 눈물로 감동을 받던 시절이 생각난다. 할머니의 품을 그리며 성장해온 내가 아닌가 싶다. 할머니의 푸근하고 따스한 정으로 나를 감싸안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지금도 손자를 위해 선한 말만 골라하는 지고지순의 할머니가 그립다.


    군 생활이 끝날 무렵 집을 공주로 이사를 하면서 할머니를 온 가족으로 모셔왔다.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어 틈만 나면 화투를 할 수 있으니 할머니도 좋아하셨다. 언제나 내가 찾아 고기만 기다리며 반가워하셨다. 그런 여장부 할머니와 손자의 애틋한 정은 어느 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의 아내를 알고나서부터 애정 전선에 이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손자에게 애인이 생기자 할머니 태도가 180도 변한 것이다. 며느리 감을 소개해 드리면 반갑게 좋아할 줄 알았던 나는 의외의 눈치에 어쩔 바를 몰랐다.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손주를 당신에게서 빼앗은 도둑처럼 생각됐던 모양이었다. 화투를 즐기며 적적함을 달래던 손자와 멀어질까 두렵고 불안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손주에게 며느리 감이 따로 있었다는 말까지 아내에게 할 정도로 아내에게 싫어한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실제 할머니 예감이 적중했는지도 모른다. 결혼 후 10년 가까이 사시면서 손자가 놀러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쓸쓸한 삶을 사시도록 무심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86세가 되던 95년 어느 여름날. 전 날까지 정정하시던 할머니는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셨다. 쓸쓸하고 허전했던 당신의 삶을 완성 짓고자 준비해왔던 것처럼 조용히 당신의 삶을 내려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친구들과 나는 할머니를 행여에 싣고 선산 뒤편 한적한 곳으로 평안히 모셔 드렸다. 나는 장미 담배와 화투 한 목을 할머니 영정 앞에 놓고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내게 베푼 사랑만큼 갚지 못한 부족하고 못난 나를 마음껏 꾸짖고 원망하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인생에 가장 오랜 기억과 가장 소중하고 훈훈한 인연이라면 외할머니와 추억이 아닐까. 그런 내가  어느새 할아버지가 됐다. 할머니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던 손자가 이젠 두 명의 손주를 두고 또 다른 손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될 예정이다. 손자를 보면 눈물이 절로 흘러나오고 마는 원인을 이제야 알게 됐다. 나의 할머니 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외할머니가 내게 준 정이 그리워 나도 몰래 사무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유한한 삶에서 무한의 가치로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경험처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무언가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상상으로 허둥댈 때가 있다. 내 마음속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이 그러하듯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의 가슴속에 내 인생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상상을 할 때 두려움을 견디기 어려울 때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들어  생산활동을 멈추고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는 상태로 살다 보니 허탈하고 공허한 느낌이 자주 찾아오곤 한다. 희망이나 기회가 아닌 절망과 체념의 삶처럼 괴로운 삶은 없질 않은가.


    그렇다고 세월이 만드는 변화는 거역할 순 없다. 태어났기에 누구나 언젠가 죽어야 한다. 쇠퇴와 노화를 막아낼 장사는 아무도 없으니 공평한 삶이다. 그러니 아까운 삶을 대충 살 것이 아니라 잘 살아야 한다. 죽지 못해 살 게 아니라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 죽도록 사랑하다 보면 슬픔과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살맛 나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최적의 답이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 누군가에 미쳐 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멋진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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