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규탄 및 특검촉구 국민행동 대회
나뭇잎이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린다. 낙엽이 뒹구는 가을을 보고 단풍놀이를 재촉하는 아내다. "단풍 구경 언제 가지?" 하고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른다. 가을이면 차를 몰고 단풍 나들이를 즐기던 우리 부부다. 설악산과 내장산, 대둔산 계룡산 등 여기저기 산을 찾아다녔다. 한데 이번 가을은 단풍놀이를 떠날 기분이 아니다. 정국이 어수선하고 불안한 데다 단풍마저 아름다워 보일 리가 있겠는가. 망설이던 차에 아내에게 말했다. "모레 서울에 바람이나 쐬러 갈까?" 말했던 것이 벌써 열흘 전이다.
서울에 놀러 가자는 말에 귀가 번쩍이던 아내다. "서울은 왜?"하고 멈칫하며 되묻는다. "국정농단 규탄대회나 갔다 올까 해서". "당신이 그러면 그렇지. 혹시 했더니..." 실망스러운 눈치다. 속으로는 동의할지 몰라도 몸은 거절 의사 표시다. 모처럼 서울 동행이니 그래도 좋아하지 않을까 했다. 단풍놀이 대신 서울역 광장에 가면 소리라도 실컷 지르고 나면 답답한 속이 후련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1차 집회에 가능한 많은 국민이 모이면 좋겠다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58년 개띠 동갑내기다. 보릿고개 최빈국 아이에서 문화 경제 선진국이 된 지금 노년기에 접어든 생존 동지다. 중학교 입학이 추첨제로 바뀌고 고등학교 연합고사도 58년생부터 시작됐다. 사회 변화나 굴곡마다 중심이던 베이비 부머 세대로 살아왔다. 생존을 핑계로 기득권에 기댄 적도 있지만, 민주 평화를 외치느라 최루탄 냄새로 고생도 했다. 더구나 우리는 41년 동안이나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부부다. 가정과 삶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통과 역경도 함께 견디며 살아온 공동 운명체다. 혼자 버스를 타면서 그런 생각에 잠겼다.
노은 농수산 시장 주차장에 서울행 버스가 기다렸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금방 안면을 텄는데 차 안은 친숙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퍼진다. 아내 몫까지 버스비 5만을 지불했다. 물과 바나나를 나눠준다. 제일 좋아하는 깨끼떡도 받아 들었다. 탄핵과 특검을 외치러 가는 중인데 가을 소풍을 가는 기분이다. 주말 고속도로도 매우 붐볐다. 점심을 먹기 위해 안성 휴게소에 들렀다. 푸른 조끼를 두른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들어온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참가자들이다. 서로 처음 만나는 사이여도 반가운 동지애가 느껴진다.
꽉 막힌 한강교를 지나 터널을 뚫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숭례문까지 도로가 광장으로 변해있고 절반은 이미 인파로 가득하다. 중간쯤에 위치한 대형 모니터 앞에 우리 일행도 자리를 차지했다. 참가자들은 계속 밀려오는 중이었다. 선도 깃발을 따라 탄핵과 특검을 외치는 피켓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광장은 어느새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한 분노의 얼굴로 꽉 찼다. 흥을 돋우는 식전 공연이 펼쳐지고, 드디어 국정농단 규탄 및 특검촉구 국민행동 대회가 시작됐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구호와 함성 소리에 흠뻑 빠졌다.
30만 거대한 함성 소리는 폭발 직전 상태임을 직감케 한다. 특히 노년층이 많이 참석한 사실이 놀라웠다. 주의를 돌아보니 또래쯤 보이는 이들이 절반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수 편향이 심한 주변 지인들에 비하면 예상치 못한 결과다. 보수 성향의 기성세대들이 실망할 정권이라면! 유권자의 기대와 열망으로 정권을 내려놓게 할 가능성도 크지 않을까. 싶었다. 촛불 혁명으로 국정 농단 정권을 심판했던 경험을 이미 했기 때문이다. 표를 몰아준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많은 걸 보고 그런 상상을 했다.
국민 여론 80%가 대통령 국정 운영을 지적한다. 노벨상 수상자가 초대를 거절하고 퇴직 교수가 훈장을 거부할 정도로 못마땅한 정권이다. 전국 곳곳에서 정권 퇴진을 외치는 교수들의 시국 성명 발표와 시위가 늘고 있다. 국가 안위를 걱정하고 불안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심각한 국가적 위기 상황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현 정국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임기를 마치겠다 한다. 사태 수습에 나선 대국민 담화에 한숨만 나온다. 중언부언하며 변명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말투는 좌절감과 모멸감이 느껴질 뿐이다.
더 이상 망가지게 놔두면 안 될 것 같다. 나랏일을 가사로 여기는 정권이 임기를 마치면 회복불능이 될 게 뻔하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젠 그들이 국정에서 손을 뗄 수 있게 돕는 게 최선이다.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만 풀 수 있다. 주권자들이 선택하여 부여해준 국정 권한은 주권자가 권한을 내려놓게 할 수 있다. 기성세대들이 내린 과오로 벌어진 일이니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한다. 촛불 혁명으로 국정 농단을 심판하여 성공했듯이 내가 나서야 한다. 30만이 300만이 되면 그만두게 할 수 있다.
이번 주말 서울에서 제2 국민 집회가 있다. 지난 서울역 광장 나들이처럼 이번 주말도 반납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집회엔 아내와 가족, 지인들을 손을 잡아끌고 가야겠다. 가을 단풍 여행보다 의미 있고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손주들이 언젠가 묻게 될 것이다. 아빠 엄마는 대한민국이 후퇴하고 위기에 처할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그때 나는 주말 휴식을 반납하고 민주 사회를 지키려는 주권자 시민 대회에 참가했다. 말하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시민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