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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Feb 25. 2023

1. 오늘치 숙제를 해치울 것

<어른되기 설명서>

이상으로 두었던 모습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다. 공부 잘하는 아이와 부모님 말 잘 듣는 아이, 어디에서나 ‘예스’라고 말할 줄 아는 성실한 사회인, 아이에게 헌신하고 가정에 충실한 아내.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이 다양할수록 쏟아지는 기대는 감당하기 어렵게 마련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되던 하루는 왜 우울한지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저만치 내달린다. 무의미한 관계에 나를 던지고, 소모적 전투에 시간을 쏟아보아도 돌아오는 건 허탈감뿐이다.


설령 원하는 바를 이루어도 혹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갈망은 컴플렉스의 틈을 비집고 스멀스멀 올라오게 마련이다. 이쪽 전세를 탈출하여 저쪽 전세로 진입할 때, 내 집마련에 성공했을때, 꾸역꾸역 대중교통에 나를 밀어 넣다가 차가 생겼을 때, 값비싼 옷과 명품 시계를 장만했을 때. 그럴듯한 인스타 피드를 올릴 때. 이루고 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인생에 대한 회의와 의심은 매번 내 정수리에 똬리를 튼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어느 아침, 욕실에서 거울을 보며 묻겠지.


“나 잘 사는 건가?”


책읽고 글쓰는 삶을 살기로 택하며 나는 인생의 기회비용을 현금의 가치로 환산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현대사회에서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투입 대비 산출의 능률성으로 설명된다 해도 나만큼은 보여지기 위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많이 갖고 태어나지 못했음 역시 탓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일과 같으니까. 내가 나고 자란 ‘환경’과 마흔을 훌쩍 넘긴 ‘나’를 필연적 인과관계에 놓는 건 본인의 미성숙함을 광고하는 게 아닐까.


만약 아이가 커서 나에게 왜 엄마는 그때 육아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느냐 묻는다면.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게 내 최선이고 난 거기까지가 한계였다고. 그 이상을 너에게 쏟아부었더라면, 나도 너를 온전히, 너 자체로 사랑하지 못했을 거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원망하고, 돌본다는 핑계로 집착했을지 모른다. 그런 관계는 무덤과 같다. 덧붙여 이제 너와 나의 사이에는 ‘왜 그랬어’가 아니라 ‘어떻게 갈까?‘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겠지. 이마저도 못 알아듣는다면? 그래. 그건 다른 측면에서 어미 탓일지도.


사람의 뒷모습에는 앞모습을 읽어낼 때와는 다른 은유가 숨어있다. 한자어로 순瞬은 ‘잠깐’을,  간間은 ‘사이’를 의미한다. 저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앞모습과 뒷모습이 스치는 순간, ‘잠깐의 틈’을 재구성하다 보면 그 끝에 나 자신이 있다. 그렇게 재조립된 틈에는 콤플렉스가 배어들 여지가 없다. 눈과 귀를 닫고 견고한 나만의 성채에 고립되어 늙어가는 건 절망적이다. 글은, 글을 나누는 일은 어찌 가야 하는지 스스로 나침반을 들고 나서는 과정과 같다. 이건 어떤 경력이나 연봉, 화려한 배경 혹은 부동산으로 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탓‘을 멈추고 ’코‘ 앞의 실천‘에 이르러야 비로소 보이는 경지. 오늘 분량의 실천을 해치우고 뿌듯하게 잠자리에 들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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