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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Sep 25. 2023

초고라서 가능한 결심

딱 한 번 쓰고 마는 초고란 없다

 오늘의 밋밋한 순간을 되짚다 보면 힘들었던 순간에 닿을 때가 많다. 아이를 키우던 지난 10년, 그날의 기록은 ‘몇 년 전 오늘’과 같이 느닷없는 SNS 알람으로 다가온다. 오감으로 각인된 부끄러움일수록 실감 나게 재생되는 법이다. 어려서, 노련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내 한계와 바닥으로 가라앉던 순간의 모음. 글을 쓰면서 이 기억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얼마 전 차마 공개하지 못했던 사진 하나가 알람과 함께 SNS 맨 위에 띄워졌다. 선명한 두 줄이 그어진 임신테스트기. 일순간 마음이 헝클어졌다.


 셋째가 생겼음을 알게 된 건 백화점 화장실에서였다. 발버둥을 치는 마음으로 둘을 키웠는데, 예기치 못한 변수가 또 찾아든 셈이다. 아이들을 원에 보내고, 이부자리조차 정리하지 못했던 어느 날, 해외 출장 비행기를 막 탔다는 남편의 문자를 받았다. 저녁 고민에서 해방된 며칠, 때마침 반찬을 해두었다는 친정엄마의 전화에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진땀이 났고, 어지러워서 걷다가 중간에 몇 번을 멈춰 쉬어야 했다. 며칠 전부터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꿈에 시달렸다. 꿈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리도 생생할까 여겼을 정도로 일상생활 중에도 수시로 숨통이 죄어왔던 것도 같았다. 카페인 금단 증세와 입덧을 착각했던 나는 커피와 두통약을 번갈아 무심히 들이부었는데. ‘설마’, 그리고 뒤이은 ‘아차’.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한 개 구입했다. 확인만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백화점 화장실은 깨끗하니까,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하면서. 그러기를 몇 분, 선명한 결과에 도리어 입이 다물어졌다. 일이 생겨 엄마에게 못 가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집에 돌아와 흐트러진 이부자리 위에 겉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누웠다.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돌아오기까지 세 시간. 오만가지 나쁜 생각과 자기 원망, 비관적인 미래에 대한 상상이 오가던 아득한 시간이었다.


 글쓰기의 구체적 효과라면 별다른 성과 없는 하루 중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 그뿐일지 모른다. 오히려 글을 쓰며 아득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이 몇 배 두렵다. 반복 재생되는 순간을 글로 옮기면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마음이 일렁였다. 나의 글쓰기 선생님들은 손가락이 가는 대로 쓰라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차마 꺼내지 못했던 내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 스스로 묻곤 했다. 겁이 났으므로. 초고 속의 나는 좀 더 간절했던, 훨씬 화가 났고, 옹졸했던 과거의 나와 전혀 다른, 존재한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미화된 사람이 되곤 했으니까.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의 공저자 남궁인은 “글이란 내가 얼마나 구린지 본격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용기를 내 자모를 맞추고, 문장을 만들어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라 말한다. 나에겐 과거의 구린 나를 마주할 용기가 얼마나 있을까. 덮어버릴 수 없는 일에 마침표를 찍고 후련히 털어낸 순간은 몇 번이었나. 자기변호는커녕 왠지 모를 찜찜함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다가 뭉텅이로 글을 덜어내고, 다시 한 글자씩 천천히 내딛다가 말 줄임표로 말꼬리를 흐리고, 엔터키를 눌러 내뺄 뿐이다.


 이후 몇 년, 나는 다시 젖먹이를 품은 어미가 되어 아이들과 한 몸으로 뒹굴었다. 둘이 아닌 셋은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무너지기 직전의 나, 숨이 차올라 허덕이는 날것의 나를 수십 번 만났다. 그러다가도 가장 쉽게 행복해지던 나도 만났다. 아이들과 나란히 누워 ‘똥’ 이야기, ‘방귀’ 이야기를 나누면 그뿐이었다. 그저 깔깔깔 웃으며 우리는 한없이 가벼워졌다. 자체만으로 충분히 좋은 하루가 되었다. 초고를 쓰는 요령이란 툭, 가벼이 떨어뜨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똥이나 방귀 이야기처럼 매번 마음 가는 대로 초고를 풀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애썼던 순간을 조금씩 풀어낼수록 더 나아진다는 ‘확신’과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여기 까지라는 ‘인정’이 필요하다. 위축되지 않고 꾸준히 나를 다독여보기로 했다. 글 한 편을 더 얹는 데 실패하고, 두서없이 뒤틀린 문단에 괴로운 한 주를 보냈더라도 다시 월요일, 첫날, 첫 달이 시작되듯 어떻게든 적어놓고 나면 새로운 글의 단서가 된다. 쓰다가 또 쓰고, 덧쓰다 보면, 앙금처럼 남는 부끄러움이라도 쓰일 데가 있었다. 끊임없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만드니까. 초고니까 가능한 결심이다. 초고는 오직 한편이지만, 딱 한 번 쓰고 마는 초고란 없다. 이 글이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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