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 편이니까
“세상살이가 힘들고 지쳐도 온전한 나 편 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 나가 너 편 해줄 테니 너는 너 원대로 살라.”
바람을 맞으며 웅크리고 앉아있는 두 여자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영화 <계춘할망>에서 계춘할망이 혜지에게 건넨 대사입니다. 둘의 모습은 파도와 어우러진 풍경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이들의 나란한 모습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만 비치기에 더욱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뒷모습에는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의 뒷모습에 시선이 머무르는 이유이지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춰 왔던 길을 돌아보곤 합니다. 글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문장이 꽉 막혀 더 나아갈 수 없을 때면 썼던 글을 연거푸 읽으며 앞으로 나아갈 단서를 찾곤 했어요. 지나치고 놓친 것은 없는지, 결국 나아가고 싶은 방향이 어딘지 멈추고 돌아보며 서 있는 곳을 가늠했습니다. 이 또한 어디까지나 글쓰기가 개인적인 작업일 때의 이야기지요.
어쩌다 글쓰기 수업 현장의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게 된 걸까요? 글쓰기는 여전히 두려운 일이지만, 둘러앉은 자리에서는 뭐라도 들고 와야 했습니다. 한 문단을 힘 있게 밀어쓰려면 나만의 비밀과 생각, 삶의 일부, 못난 내 모습을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야 했지요. 기억력은 수시로 한계를 드러냈고, 구간 반복처럼 엇비슷한 문장이 글마다 되풀이되었어요. 공공의 자리에서 내 글에 대해 거론할 때는 식은땀부터 흘렀습니다. 아닌 척 딴청을 부리고 우스갯소리로 말을 뭉개곤 했어요. 사람들 앞에서는 한 글자도 쓰기 어려웠습니다. 피드백과 응원으로 계속 글을 쓰라고 독려하는 역할을 맡은 제게 합평은 더 곤혹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이런 제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수업을 시작하겠다는 신호로 헛기침을 할 때면 자세부터 바르게 고쳐 앉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어렵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어느 한 분 수업에 빠지지 않고, 과제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엄마 이야기, 기억 저편의 아버지,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시간에 머무른 어른 아이, 일상에 치여 사라져 가는 시간, 김장 김치와 쑥버무리, 스팸과 흰 밥의 맛, 대물림되는 운명과 벗어나려는 발버둥. 많은 분의 글이 한꺼번에 제 몸을 통과해 지나갔습니다. 이제 와 말이지만 자기 글을 낭독하는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며 차라리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한 번쯤 목구멍에 알약이 걸렸던 경험, 해보셨겠지요.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개운해지지 않고 종일 목구멍에 쓴 물이 오르내립니다. 어떤 이야기는 목구멍에 걸린 알약과 같습니다. 나름의 피치 못할 사정을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해야 할 말을 삼키게 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란 말은 너른 포용인 듯 다가와서 맥없이 주저앉게 만듭니다. 바로 그때, 미처 소화하지 못한 이야기, 목에 걸린 알약은 약 냄새와 속쓰림으로 거북한 존재를 알려와요.
내 서사에서 불편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언급을 몽땅 배제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생은 희망보다 절망이, 기쁨보다 슬픔이 가득합니다. 우린 저마다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슬쩍 넘어가고 싶어도 풀어내지 못한 바로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 나아가고 싶은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 되어드리고 싶었어요. 자기 이야기를 거듭 말할수록 글을 쓰는 자신을 멀리 그리고 가까이, 바라보며 생각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글을 제가 가장 먼저, 반복해 읽어야 했습니다.
아등바등 살아도 부족한 세상입니다.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환대, 호의, 응원을 부어주는 기분 또한 나쁘지 않았어요. 뭔가를 해보겠노라는 마음, 이대로 머무를 수 없다는 간절함으로 악착같이 글을 껴안은 여러분에게 기대어 저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살아내기 위해 그리 많은 사람의 인정이 필요한 건 아니었어요. 너 원대로 살아보라 말해주는 딱 한 명이면 충분했지요. 이번에도 망했다는 예감이 드는 이 글을 여러분이 읽어주기만 해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버티는 중인가요? 길을 잃은 그때, 포기하고 싶은 그 지점에서 더 나은 글이 시작됩니다. 저는 당신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