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아,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았어.” 지난 월요일 오후, 졸던 나는 엄마의 전화에 퍼뜩 잠이 깼다. 부모님은 지난 일요일 처음으로 두 분만의 유럽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부모님 친구들과 함께 가는 단체 관광도, 세 딸이 모시고 가는 가족 여행도 아닌, 두 분 스스로 선택한 여행이었다.
그동안 부모님은 당신에게 들어가는 돈이라면 끔찍이 아껴왔다. 속옷은 구멍이 날 때까지 입었고, 브래지어나 양말을 기워서 착용하는 건 기본이었다, 치약이나 화장품 튜브는 늘 중간을 잘라서 손가락으로 싹싹 긁어 썼다. 엄마는 파운데이션을 오래 쓰기 위해 베이비 로션과 섞어서 얼굴에 쓱쓱 비벼 발랐고, 한겨울 난방비는 평균 2만 원을 넘지 않았다. 47년생 아빠는 택시 운전을 그만두며, 이제는 너희 엄마랑 여행을 다니며 여생을 보내겠노라 장담했고, 엄마는 고롱 팔십에 비행기 태워주려느냐 쏘아붙이면서 아빠에게 은근히 기대하던 터였다.
부모님의 여행을 대신 준비하며, 두 분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무력한 상황인지 알게 되었다. 스스로 티켓팅을 못 할 뿐 아니라 상담원에게 여권 번호를 불러주거나, 여권 사본을 메시지로 보내고, E-티켓을 주고받으며 확인하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그동안 부모님의 해외여행은 주로 친구분들 대표가 도맡아 준비해 주었거나, 딸들이 처리했으니, 직접 준비해 본 경험이 없었던 터다. 특히 코로나 이후 여행 관련 절차가 대부분 전화 상담이나 카카오 메시지를 통해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며, 대면 업무에 익숙한 부모님 세대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 되고 말았다. 사계절 옷이 어지럽게 놓인 방 한가운데에서 겨울옷을 골라 캐리어에 챙겨드렸고, 출국수속 하는 통로 앞까지 모셔드린 것이 지난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파리에서의 첫 일정을 시작하려는 찰나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식사 중에 국내 여느 식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은 가방을 의자에 걸어두고 음식을 가지러 일어섰고, 그 모습이 도둑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외국에서 핸드폰 쓸 일 없어. 괜히 요금만 더 나오니 로밍하지 마.”
손사래 치는 엄마에게 긴급한 일이 생기면 딸들한테 전화하라며 억지로 로밍 신청을 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엄마는 아빠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서 카드와 엄마의 핸드폰을 정지해 달라고 했다. 내가 느꼈던 안타까움은 단순히 물질적인 손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드를 여러 장 갖고 다니는 건 소비와 직결된다는 신조로 살아온 엄마가 사용하는 신용카드는 딱 한 장, 아빠는 그마저도 갖고 있지 않았다. 복잡하게 여러 신용카드사에 전화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97년 IMF 이후로 성실하게 한 은행만, 그것도 예‧적금만 이용했던 엄마였으니, 은행도 하나, 카드도 당연히 하나였다. 해당 은행의 VIP 고객이라 지점장이 직접 은행 업무처리를 해준다는 게 엄마에겐 나름의 자부였다. 엄마의 경제관념은 자신의 인생이나 미래를 위한 준비보다 그저 절약이라는 신념에 충실했다.
1993년, 아빠의 회사가 완전히 부도처리 되고, 우리 가족은 가방 하나에 며칠 입을 옷가지만 챙겨서 목포에서 서울로 왔다. 아빠는 화물 트럭을 몰았다. 그와 동시에 엄마의 경제활동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아빠의 트럭 옆자리에서 서울 북쪽 끝에서 경기 서쪽 끝으로, 충청도로, 그리고 경기 남쪽으로 함께 동분서주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모두 콘솔 박스나 조수석 포켓에 전국도로 지도책을 꽂고 다니던 때였다. 아빠의 끼니를 챙기고, 아빠가 졸 때 옆에서 깨워주면서 대신 지도를 보고, 전화 주문을 받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었다. 두 분은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찬밥 한 덩이와 김치 볶음, 또는 유부를 양념에 졸여 만든 유부초밥을 싼 도시락과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과 맥심 커피 믹스를 들고.
그 무렵 엄마는 종종 우리에게 서울 한강에 놓인 다리가 21개라고 알려주곤 했다(2002년 기준). 특히 한남대교와 동호대교 사이에 있는 두무개 다리라는 터널은 한강이 훤히 보여 신기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서울 토박이도 아니고 자가용을 타고 서울 시내 드라이브를 해본 적 없던 나는 그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의 도시락 시중이 끝나고 나면 엄마는 지하철을 타고 귀가해서 동네 초등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세 딸의 학습 습관을 잡았던 경험이 있었으니 아이들은 금세 한 명에서 세 명으로, 다섯 명으로 늘었고, 한 달 식비와 딸들 문제집 값을 벌 정도가 되었다. 목포에서 깐깐한 시어머니에 시동생들까지 챙겨가며 바깥나들이 한번 제대로 못 한 엄마가 저리 열심히 서울을 누비고, 수입에 엄마의 기여분이 있어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엄마의 바람은 빈털터리로 서울에 올라온 가족이 무사히 자리를 잡는 것, 그리고 세 딸이 어려움 없이 성장하는 것이었다. 가정을 온전히 지탱하려는 일념. 아빠가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생계 부양자의 자리를 잃자 엄마는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몸소 나섰다. 바지런했던 아빠가 몇 년 사이 다시 생계 부양자의 역할을 되찾자, 엄마는 곧 주부라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후 다시는 하나의 독립된 경제적 주체로 집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힘을 잃어갔다. 아껴야 한다는 삶의 절대적 가치 아래 취미 활동은 배부른 타령이었다. 엄마는 모든 사회적 활동을 스스로 끊고, 집이라는 공간 안에 다시 자신을 가두었다.
그동안 아무리 성실히 살아왔더라도 스스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은행 잔고는 미래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기억에서 만큼은 강인했던 엄마가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손발이 묶인 모습은 이 사실을 재확인해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어떤 현대 기술과 시스템으로도 이런 엄마의 상황을 구제해 줄 수 없다고 비관했다. 한 인간으로 자신의 꿈과 자립을 유보한 채, 아내이면서 보호자의 역할에 충실했던 시간은 그녀의 가능성을 가둔 굴레였는지도. 오랜 세월 엄마는 사회와 가족이 요구하는 역할 속에 자신을 대입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서울로 막 이사 왔을 무렵, 엄마의 나이가 되어 내 기억 속의 엄마를 글로 옮긴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가정주부 이상의 존재였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글로 옮긴 “이 허구적 인물은 포착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 없는 상태로 머무”를 뿐이다. 엄마에 대한 기억의 파편을 떠올리고, 연결할수록 내 “문장들은 어떤 어두움 속으로 빠져버린 채 원고지 위에 뒤죽박죽 나열되고 만다”(p.41, 『소망없는 불행』). 쓸수록 분명해지는 건 내가 엄마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 속에서 오랜 시간 체화된 무력감과 경제적 박탈감의 경험을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내가 엄마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다. 결국 엄마에 대한 글쓰기란 보이지 않던 부분을 보이게 만들고,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엄마의 삶은 단지 헌신으로만 정의될 수 없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다. 내게는 미래 진행형으로 펼쳐질지 모를 우리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오늘 새벽에 전송된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고 활짝 웃는 엄마와 아빠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핸드폰 하나로 번갈아 서로의 사진을 찍는지, 예전보다 나란히 찍은 셀카가 많아진 모습에서 내 기억 속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들에 대해 훨씬 더 자세히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사진 속 엄마의 웃음이 전하는 메시지만큼은 분명했다. 엄마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도 쓰이고 있다는 것. 그 흔들림 속에서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