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난달 Jul 12. 2020

아빠처럼 살지 않기 실패

내 미래를 내 과거에서 봤을 때의 그 두려움

오늘도 친구들과 술 한 잔으로 금요일을 마친다. 뭐, 매주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 이런 순간의 여유와 웃음조차도 사치로 느껴질 때가 있다. 왜냐면, 럴 때조차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빠다. 27여 년 같은 공간에 살아 숨 쉬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기억을 공유했던 사람. 내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했던 사람. 그리고 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기에 부정하고 싶은 사람. 그의 과거에서 내 현재가 보이고 곧 미래가 보여서 닮기 싫은 사람.

 

나는 안다 이런 글은 당선이 안될 걸. 그래도 뭐 내 생각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이 글은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의 내 두려움과 실패에 대해. 요즘 불면증에 시달린다. 꿈에서 내 미래를 본다. 나는 남자다. 남자는 점차 빠르게 변한다. 늙는다. 특별히 인생에 도움되는 보편적인 것들을 안 한채 세월을 보낸다. 시대에 따른 의무들 말이다. 예컨대, 자격증이나 외국어 공부 뭐 이런 것들을. 치 수년, 수십 년 전 아빠처럼 말이다.


하루는 아빠에게 물었다. 우린 왜 이렇게 못 사는 거냐고. 남들 다하는 외식 한 번 못 하고, 화장실은 왜 17살까지 푸세식이며, 보일러는 왜 23살까지 연탄보일러냐고. 나는 억울했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가정에 태어남이 억울했고 친구들은 다 갔던 학원에 못 간 게 억울했고, 그 끝에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작아지고 소심 해지는 내 성격이 억울했다.


그 모든 책임은 아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빠의 장례식 그 날, 나는 아빠에 대해 여러 친척에게 들었다. 아빠에게 내가 모르는 딸이 있다는 것을. 당시라면 집을 살 수 있던 돈으로 엄마 몰래 차를 샀다는 것을, 벽돌 사업에 실패해 7살의 내가 단 칸방에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 번을 다시 태어나도 먹을 술을 살아있을 때 먹었다는 것을. 생전이라면 못 들을 이야기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난 죽음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앞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날을 그리기 위해 도화지를 폈는데 내 미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린이는 아빠였고 내 삶은 그의 오마주였다. 누군간 말했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어 있는 거라고. 펼쳐져 있는 시공간 위에 우린 지나가는 것뿐이라고. 이미 다운로드 완료된 영화를 본 것처럼 우리네 삶은 정해진 운명이라고.


나는 절반의 아빠고 절반의 엄마다. 그들의 DNA는 내 몸에 있다. 밀어내고 싶지만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내 삶은 원래 그런 거야, 피가 섞었으면 따라가게 되어있지, 얼굴도 키도 마음도 심지어 운명도" 이런 말들은 위로될 수 없을뿐더러 게으른 내 삶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정말 안 좋은 사실은 문제를 알면서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거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나'라고 느낄 때다. 밀려오는 자기 혐오감과 후회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생을 달리 살고 싶지만 도통 길이 없다. 수많은 동기부여 동영상 시청을 해도, 미라클 모닝 같은 책을 읽어도 나는 마찬가지다. 아침 햇살이 쏟아져야 겨우 눈 뜬다. 어린 시절 꿈은 잃어버린 채, 삶의 이유는 어느새 돈을 벌어 대출금을 갚는 것으로 옮겨갔다.


애써 겉으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지만, 속은 비관론자에 피해망상증 환자일지도 모른다. 습관적으로 말하는 "엄마 내가 호강시켜 줄게"는 글쎄, 지킬 수 있을까 두렵다. 예전 삶들에 비하면 넉넉해진 집과 버는 돈을 생각하면 지금 행복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마음의 대답은 "전혀"다.  언제든 아빠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으니까. 언제나 망할 수 있으니까. 언제나 불행에 빠질 수 있으니까.


나는 이번 공모전 주제가 실패, 두려움이라는 것에 대해 놀랐다. 과할지 모르지만 자칫 누가누가 불쌍한지, 누가누가 불행한지 넋두리를 펼치는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나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모두 본인들의 삶이 제일 힘들다. 당연하고 공감된다. 다만 "내가 더 불쌍하고 불행하니까 힘든 척하지 마" 같은 이야기는 없었으면 좋겠다. 불행엔 등수를 매길 수 없으니까. 그냥 슬펐으면 좋겠다. 그냥 슬퍼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수의 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