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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난달 Jun 02. 2020

국수의 연

아빠와 아들의 식사

어린 시절부터 국수를 참 좋아했다. 엄마가 만든 따뜻한 멸치국물에 호박이나 계란 같은 고명이 올라간 국수였다. 밥 짓는 고소한 냄새는 없었지만 엄마가 국수를 만들어준다 하면 금세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나에겐 국수가 일종의 패스트푸드였다. 빠르게 먹을 수 있고 자주 먹지 않아 특별한 음식. 다른 반찬 없이 김치만 있어도 충분했고 따뜻한 국물까지 먹으면 마침내 배가 불렀다. 후루룩, 또 후루룩. 단번에 입에 넣어 끝나는 밥 한 숟가락보단 국수 면발을 입안으로 당기는 게 더 재밌었다. 입에 들어오던 면발의 반대편에선, 아직 입안에 들어오지 못한 면발들이 이리저리 튕겼다. 그 모습이 가끔은 펄떡이던 생선 같기도 했고 지렁이 모양 젤리 같기도 했다. 국수는 항상 다른 모습으로 배고픈 날 채워줬다.


사실 엄마는 나보단 아빠가 좋아해서 국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국수를 먹을 때면 아빠 이야기를 꺼낸다. 한평생을 같이 살면서 밥은 두 공기를 못 먹던 양반이 국수만 만들면 세숫대야 냉면 그릇에 만들어도 다 먹었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내가 기억하는 국수 먹는 아빠도 이와 비슷했다. 사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치아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아빠는 밥을 많이 안 먹기도 했지만 못 먹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빠에게 국수란 밥보다 좀 더 먹기 편한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다란 면은 가위로 자르고 먹기 시작할 수도 있고 밥보다야 면이 얇았으니까.


한편 국수는 그 긴 면발로 아빠와 아들을 한 식탁에 앉게 해 줬다. 아빠 생전에 한 상에서 같이 밥을 먹는 일은 드물었다. 딱히 사이가 안 좋거나 아빠가 조선시대 선비라서 겸상을 안 한 건 아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자의 일 때문에 밥시간이 점차 달라졌다. 그게 곧 편해졌다. 이따금 둘 중 한 명이 밥을 먹는다면 그 사람이 다 먹고 식탁에 차림을 그대로 둔 채 간다. 이후 다음 사람의 차례를 맞이하게 되어 식사를 이어가곤 했다. 엄마는 두 남자 사이에서 자유롭게 밥을 먹거나 아예 따로 먹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의 한 상에서 식사는 당연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국수가 해냈다.


면은 붇는다. 밥이 식으면 다시 밥솥에 넣으면 다시 따뜻해져서 먹을 만 하지만, 한 번 붇은 면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엄마가 국수를 만들 때면 온 가족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와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해서 많은 말을 주고받은 건 아니었다. 원래 말이 많이 안 하는 나였기도 했고 아빠도 평소에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대화가 적은데 식탁 앞이라도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음식을 먹느라 입을 말하는데 쓰기 어려웠다. 그 나 저도 면은 밥보다 빨리 먹을 수밖에 없어 식사 시간도 짧아졌다. 식사가 끝나면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국수는 한 자리에 아빠와 아들을 모이게 해 준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추운 날에는 따뜻한 국물 요리를 잘 먹었던 우리 가족은, 그날도 어김없이 엄마가 국수를 만들어줬다. 그날은 식사 시간이라도 아빠와 대화를 나누고자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가장 좋은 소재는 역시 날씨였다.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기쁘거나 슬픈 일에 대한 감정 없이 가볍게 서로 공감하며 말할 수 있는 건 날씨 이야기가 최고였다. 그 날은 계절로는 봄이었지만 추운 날이었다. 꽃샘추위가 오면서 '날이 춥다'라는 대화를 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아빠 생전에 내가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지금도 이따금 엄마가 국수를 만들어준다. 엄마의 국수는 여전하다. 따뜻한 멸치 국물과 넉넉한 양까지 그대로다. 다만, 같이 먹던 아빠는 이제 같은 상에 앉는 게 아닌 엄마의 말을 통해 함께한다. 국수를 먹을 때면 아빠 이야기가 나온다. 칭찬을 하다가도 욕을 하고, 험담을 하다가도 아련한 이야기들을 푼다. 나도 그때마다 아빠 생각을 하곤 한다. 이젠 엄마와 둘이서 한 식탁에 앉아 국수를 먹는다. 나도 전보다는 엄마와 많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아직 비가 오면 추워지는 계절의 끝에서 엄마의 국수 한 그릇을 아빠와 먹고 싶다. 그때는 좀 천천히 먹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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