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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난달 Apr 30. 2020

도전, 시작은 축구기자였다지

나도 작가다②

역사를 좋아해서 사학가, 역사 선생님이라는 꿈을 꿨던 나는 같은 이유로 다른 꿈을 잠시 가졌다. 축구선수였다. 초등학생 시절 축구선수를 꿈에 둔 어린이는 아마 나 혼자만이 아닐 거다. 여느 사내아이들이 그렇듯 한 번 팀으로 축구 경기를 가지면 패스나 골 하나로 처음 보는 아이와 친구가 되기 충분했다. 나는 키는 작아도 많이 뛰면서 달리기가 빨랐다. 이타적인 편이라 친구들에게 패스를 잘했다. 이따금 골도 넣었으니 학창 시절 내내 반 대표 및 선발 라인업에는 무조건 들었다. 심심할 때면 형이랑 일대일로 슈팅하고 막는 놀이를 했는데 덕분에 골키퍼를 해도 부담이 없고 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축구를 잘하는 줄 알았다. 방학 때는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자'라는 문구를 A4용지에 쓰곤 내 방 벽에 붙였다. 형은 '매일 운동장 5바퀴 뛰기, 팔 굽혀 펴기 20개, 윗몸일으키기 20개'등 운동 할당량도 줬다. 하지만 그때의 난 너무 게을렀고 지금의 메시를 보고 있노라면 축구선수라는 꿈을 접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 뒤론 역사 선생님이라는 꿈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20대도 그 오름세가 다할 무렵 불현듯 축구 기자가 되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매일같이 읽던 축구 기사들을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려 글쓰기와 관련된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던 나고 축구도 나름 많이 봤다고 자부했다. 어떻게 축구 기자가 될 수 있을까 싶어 무작정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나는 축구에 대해 몰랐고 글은 만신창이였다. 내가 만만하게 봤던 기자들은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블로그에 올린 글은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창피했다. 뻔뻔함으로 가려지지 못할 글이었다. 그래서 접었다. 나는 재능이 없었고 도전의 장벽은 높기만 했다. 다시 축구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1년 뒤였다. 1년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결론은 돌고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그 시간 동안 답은 하나였다. 다시 축구 글을 쓰자.


그렇게 결심하고 3개월 정도 꾸준히 글을 썼다. 완성도는 높지 않았지만 발행 버튼을 누를 때마다 스스로 조금씩 발전했다고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성과 아닌 성과가 나왔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내 글이 올랐다.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대한 프리뷰 글이었다. 사실 별생각 없이 빠르게 만든 건데 그게 조회수가 높게 나왔다. 팔로워도 어느 정도 늘었으니 성과라고 불릴만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글은 메인에서 사라졌고 나는 그 포스팅 하나로 기자가 되지 못했다. 조회수나 댓글, 팔로워에 대한 알림이 켜져 있을 때, 그 울림이 가득한 핸드폰 진동을 만진 때의 설렘은 마치 아무 일도 안 일어난 듯이 사라져 갔다. 그때부터 나는 비슷한 포스팅을 찍어냈다. 마치 꿈을 이룬듯한 그 기분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비슷한 방법으로는 같은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발전이 필요했다. 그렇게 축구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눈길을 돌렸다. K리그 현장이었다.


K리그 직관기 비슷한 포스팅을 시작했다. 이젠 단순히 만들어서 발행하는 것을 넘어서 SNS 그룹 게시물로도 올렸다. 내가 쓴 글을 조금이라도 세상에 넓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축구전문 웹진을 만들 예정인 사람으로부터 왔다. 몇 차례 만남도 가지고 실제로 만들어지나 싶었지만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됐다. 아쉬움은 없었고 나는 그해 12월 초 입대했다. 여담이지만 현재 그때 일원 중 한 명이 프로젝트와 같은 이름의 축구전문지를 만들고, 축구와 게임 전문공간을 운영하는 곳으로 거듭났다. 군대에서는 대학생 스포츠 기자단 대외활동에 대해 알게 됐다. 꾸준히 관심을 가진 나는 말년 병장 시절 중대장님의 도움으로 휴가를 조정해 대외활동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 뒤로 운 좋게 1년 동안 활동했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쓴 기사가 포털 사이트 뉴스에 노출도 되고 이따금 모 일간신문 스포츠란에도 실리곤 했다. 나는 그렇게 축구 기자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그러나 아직 갈증은 남아있었다. K리그 현장 취재였다.


이듬해 기회가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K리그 구단에서 명예기자를 뽑았고 나는 글 부문에서 합격한 유일한 사람이 됐다. 현재 K리그의 구단 명예기자들은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아 정식으로 K리그 현장 취재가 가능하다. 경기에 대한 기사나 선수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블로그에 서툰 글을 쓰던 남자는 3년 뒤, 구단의 이름으로 K리그의 일원으로 기사다운 기사를 쓰게 됐다.  TV에 나오는 아나운서, 캐스터, 해설자는 물론 스태프, 선수, 감독 등 다양한 역할군과 함께 경기장에서 숨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난 정식 기자가 돼야 했고 기사로 돈을 벌고 싶었다. 활동의 중간쯤 다다른 한 여름날 내가 정말 좋아하던 축구전문지에서 면접을 볼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떨어졌다. 합격자는 1명이었는데, 함께 구단 명예기자로 활동하던 분이었다. 마 뒤 단톡 방을 통해 하 소식을 전했고 나는 이상은 축구 언론사에 지원 수 없었다.


그쯤은 대학 졸업과 맞물린 시기였다. 더불어 7개월에 걸친 영어 학원 과정도 끝을 맺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일단 돈을 벌어야 하는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벌고 싶었다. 그렇지만 갈길을 잃었고 평소에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하던 초록색 검색창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꿈은 이뤄내는 걸까 아니면 소중히 지켜내는 걸까란 답을 내지 못하고 축구 기자라는 도전을 써 내려가지 않으며 나는 다른 도전을 이어갔다. 


지난 시간이 헛된 건 아니었다. 모든 도전은 아름다운 결말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의 한 점을 찍었고 한 선을 그은 축구 기자의 꿈은 언젠가 다른 점, 다른 선과 이어질 날을 기대하며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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