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장례식에 대하는 자세

겪고 보니 알겠더라

by 김이난달


오늘 학교 축구 모임 후배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았다. 정확히는 그 친구가 단톡에 링크와 별세를 전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링크가 인상 깊었는데, 이젠 상조도 시대에 따라 서비스가 달라지나 보다.

살면서 주변 친구, 지인 장례식은 10여 차례 가본 것 같다. 어려서부터 '경사는 못가도 조사는 가야 한다'라고 들었다. 나는 그 말을 충실히 이행했다.

조부모님부터 부모님, 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늘어날 것이다. 이때 항상 애매하다고 느낀 건, 대체 인간관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각해보고 가야 하냐는 문제다.

아빠 장례식을 치르기 전엔 일단 연락이 오면 갔다. 애매한 사이도 갔다. 그러나 이젠 기준이 생겼다. 내가 겪은 조사에 왔는지 확인 가능한 장부가 있다. 예전에 갔던 조사에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 불참했다. 수년이 지나고 보니 이젠 내가 연락을 돌릴만한 사이조차도 아니었다.

저 장부는 참 현실적이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 다 알 수 있다. 장례식의 막바지 새벽이면 명부와 조의금을 확인한다.

이 순간에 내 인간관계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이렇게까지?라는 생각도 든다. 금액은 순수하게 그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아쉽거나 실망스러워도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된다. '장례식에 와준 사람들을 평생 못 잊는다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기억력이 나빠서인지 상을 당한 지 1년도 안 된 사이 애매한 관계 사람들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후배도 마찬가지다. 확인해보니 오질 않았다. 굳이 장부를 볼 필요도 없었는데, 나는 그날 장례식에 참석 유무와 상관없이 조의금만이라도 보내거나 메시지라도 준 사람들에게 모두 다른 카톡을 한 명 한 명에게 보냈다. 하루 장이었는데, 80여 명이 와주거나 연락을 주거나 마음을 표현했다.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 사람들의 경조사는 최대한 갈 것이다.

내게 여유와 시간이 많다면, 애매한 사이도 챙기고 싶다. 그렇지만 지금의 난 아니다. 모든 이에게 퍼줄 정도의 시간과 돈이 없다. 더욱이 진심으로 축하나 조의를 표현할 수 없다면 자리를 지킨다한들 의미가 있겠나 싶다. 음식값, 술값만 더 나올 뿐이다.

20살 시절 초등학교부터 동창이던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장례식장에 머물면서 운구도 했었다. 작년, 그 친구가 밤늦게까지 머무르기에 왜 있냐고 물었다. 친구는 "너도 그랬잖아"라고 답했다. 너무 고마웠다. 부담 없이 고마웠다. 결국, 친구는 장례식의 모든 일정을 함께해줬다.

관계의 측면, 그리고 기브 앤 테이크의 관점에서 경조사는 가는 게 좋다. 다만, 내겐 기준이 생겨버렸고 더 이상 애쓰지 않게 됐다.

관계의 답은 스스로가 안다고 생각한다. 선택이 애매하면 조의금만 보내거나 연락만 남겨도 괜찮다. 어차피 상주도 알고 있을 것이다.


본인 생각에 확신이 있다면 방문하는 게 맞다. 운구 혹은 그 이상도 함께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옳다. 먼저 갈 수 있다면 가는 것도 맞다. 다만 대답 없는 메아리는 스스로를 지치게 할 뿐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