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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lim Jan 13. 2019

봄을 지나갈 텐데 재로 살 것인가

이강백의 희곡, <봄날>

제공 국립극단

 

 학부 시절 동안 희곡 공부를 계속했다. 희곡은 상연되기 이전 문학으로서 한 장르를 말한다. 희곡, 시나리오, 연극, 영화 모두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구분이 무색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이번 글에서는 현대 희곡의 거장 이강백의 작품 <봄날>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성열 연출의 공연 포스터는 참고용으로만 가져왔다. 


  #<봄날>의 이야기

  멀리 보이는 산에 산불이 났다. 어지럽고 나른한 봄날이다. 산골마을에 늙은 아버지와 일곱 형제가 살고 있다. 농사를 지으며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간다. 권위를 앞세워 아들들을 혹사시키는 인색한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는 장남 그리고 병약하지만 봄을 맞아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막내가 있다. 

  지루한 그들의 일상에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산불로 인해 절간이 모두 타버리자 스님들이 동냥을 하러 왔다가, 거두어 기르던 동녀를 일곱 형제 집에 맡기고 간 것이다.

  막내는 동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의 가슴은 점점 더 활활 타오른다. 반면 병들고 늙어갈수록 아버지의 젊음에 대한 욕망은 커진다. 그리하여 동녀의 기운을 얻어 젊어지고자 한다. 밤마다 그녀를 찾는 아버지 때문에 막내는 가슴이 찢어진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장남과 막내를 제외한 다섯 아들들은 아버지의 돈을 훔쳐 달아난다. 그동안 혹사당하며 농사를 지었던 불만이 쌓여 폭발한 것이다.

  평생 동안 모은 재산도, 젊음도 모두 잃은 채로 여름이 왔다. 산골마을 작은 집에는 이제 늙디 늙은 아버지와, 장남과 부부가 된 막내아들과 동녀만이 남았다. 한여름, 집을 나간 다섯 아들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작품은 끝난다.


# 다층적 갈등, 그 근본은 강자와 약자

  <봄날>이 처음 발표된 시점은 전두환 정권 시절이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봄날>은 직접적인 시의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원형적인 갈등 구조를 통해 권력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극에 드러나는 주된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에 갈등이다. 이 갈등은 사실 여러 의미 차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시대를 관통하는 원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 착취자와 피착취인, 아버지(구세대)와 아들(현세대), 늙은 남성과 젊은 남성, 가진 자와 없는 자, 권력 계층과 피지배 계층 등등. 이들 간 갈등은 다층적으로 해석된다.


  장남과 막내의 경우는 다르다. 특히 막내가 가지는 호흡 곤란과 타오르는 가슴은 젊음, 청춘, 낭만, 사랑으로 인한 것인데, 아버지나 2~6째 아들들이 드러내는 유물적 가치와 상반된다. 그들은 노동과 육체, 물질에 대한 욕구를 전위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들이나 장남과 막내, 특히 막내는 감정과 관념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들의 대립은 곧 삶에 대한 두 가지 태도이자 또 인간이라는 한 존재 안에 모순된 두 요소를 형상화하여 통찰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장남의 경우는 이러한 낭만성의 갈등을 종결한 인물이다. 극복하지 못한 그의 갈등은 어린 동생들을 키워내는 데서 찾은 모성적 역할로 귀결되며 그로부터 삶의 소망을 찾는데, 진정한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장남에 입힘으로써 이 극에서 성별의 갈등은 무화된다. 그렇기에 장남은 반기를 든 나머지 아들들과 다르게 스스로 아버지라는 권력과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동생들을 위해 아버지와 갈등을 보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전제되었기에 절대적 반발로 이어지지 못한다.


# 이강백의 여성관

  이강백의 작품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그의 여성관에 신성시된 존재가 모성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이 가진 가장 무한한 가능성은 바로 모성이며, 특히 이 작품에서는 동녀를 다루는 방식에서 큰 한계점을 보인다. 연극 무대에서 대사를 하지 않는 인물을 여러 목적으로 등장할 수 있지만, <봄날>에서 동녀는 오브제에 그치는 수준으로 다루어진다. 양기와 음기를 운운하며 막내아들 또래의 동녀를 '품고' 잔다는 늙은 아버지의 언행은 경악스럽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는 장남이 가진 모성의 특징도 이해심 많은 포용력이다. 아버지도 이해하고, 아들들도 이해하고, 막내도 이해하며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장남의 성격은 이강백이 가지고 있는 모성에 대한 환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작품을 보다 보면 당대 작가의 시선에 부딪히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지금 우리의 관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하나. 아직 나도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한 부분이지만,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위대한 부분을 알아보고, 용납할 수 없는 부분도 굳이 감싸주지 말고. 현재 우리의 생각이 미래 누군가가 봤을 때 한계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태도가 만연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 인생의 봄날은 산불처럼 타오르고

  극의 시작부터 산불이 난다. 이중적이다. 생명력이 만개하는 봄의 시기에 산불이 난다는 것은 강력한 추동이자, 봄의 활기찬 기운이 결국 재로만 남아 죽을 것을 의미한다. 

  삶은 봄이고 산불인 것인가. 젊음을 끊임없이 욕망하는 아버지는 보편적 인간상, 특히나 권력을 가진 자의 양상과 다름없다. 그는 젊은 육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사실 청춘의 마음이 부러운 것이다. 그 어떤 권력도 거스를 수 없다는 진실이 바로 인생은 짧고 봄은 더욱 짧다는 것이다.


  젊음만큼 아프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이 없으나 동시에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다. 그것을 알고 봄을 살아내고 다음 계절을 그저 살면 되는 것인데, 사실 봄만을 그리고 살면 삶이 더욱 짧을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은 재로만 남아 계절을 버틸 뿐이라는 것. 누구에게나 봄은 공평하게 타오르고 지나간다는 점. 그것이 바로 <봄날>이 통찰한 삶이며 그렇기에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는 권력을 인생 앞에 놓아두고, 삶의 공명정대함이 권력을 철저하게 무력화하도록 둔다.


  봄이 지나고 찾아온 여름, 극의 결말부에선 후회뿐인 노쇠한 아버지와 장남, 그리고 막내 부부만이 남았다. 봄을 지나 맞은 여름에서 무대 위 등장한 것은 후회뿐인 아버지와 동녀이다. 장남과 막내에게 지나간 봄은 어떠했으며 다가온 여름이 어떨 것인지. 삶을 체념해버린 장남과 달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막내는 봄날 이상의 삶을 발견했을지. 그건 사계절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인생의 봄날은 결국 지나갈 텐데,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재로 남아 살 것인가.




by U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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