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ilU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lim Jan 13. 2019

"미친 날 위해서 미친 짓을 한 거죠. 고마워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리뷰

#정상과 비정상, 그 속에 상처 받은 치유자

- 1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사랑하기에, '알맞은' 노력으로 https://brunch.co.kr/@dldnfla0700/7

- 2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 3편: <오아시스>


제공 네이버 영화

  주인공 팻은 '더욱더 높이'라는 뜻의 'Excelsior'를 계속해서 외친다.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그는, 더욱더 높은 상태를 지향하는 신념이 치유 제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긍정적인 사고와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이토록 바람직한 생각을 읊조리는 팻의 목소리로 영화는 시작한다. 전 부인에게 쓴 편지를 읽는 그의 뒤통수를 출발하는 카메라는 크게 한 바퀴를 돌아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눈빛으로 알게 된다. 더욱더 높이 가려는 주인공 팻이 아직 많이 괴롭다는 사실을.

제공 네이버 영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영화 3편을 묶어 글을 쓰고 있다. 1편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역시 정신병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남녀 주인공 모두가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처방된 약물을 복용하거나 팻의 경우는 지속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은 단 한 번도 정신병자로서 명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외부의 시선 앞에 던져질 뿐이다. 

  전 부인 니키에 대한 의심으로 표출되는 불안이 극도에 달했던 팻은 니키가 자신의 동료와 외도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자신과의 결혼식 노래를 틀어놓고 함께 샤워를 하는 니키와 내연남의 모습은 트라우마가 되어 끊임없이 그를 패닉으로 몰아넣는다.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면 팻의 머릿속에는 결혼식 노래와 외도 장면만이 가득 찰 뿐이다. 

제공 네이버 영화

  그토록 상처 받은 결혼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팻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 이미 끝난 사랑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전에 좋았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신을 비정상의 세계에 던져놓은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면서. 그가 정신병원에서 내내 외쳤던 '더욱더 높이'의 지점은 니키와 화해하고 다시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그가 티파니를 만나게 된다. 첫눈에 그는 티파니에게 큰 끌림을 느끼지만, '정상'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관계는 오로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점차 진행된다. 정상과는 아주 다른, 무례하고 변덕스럽고 거짓이 등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이해와 치유가 존재하는 방법으로.

제공 네이버 영화

  티파니는 남편 토미와 사별하고 회사 사람들과 모두 잤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역시나 정신과 치료를 받은 그녀는 춤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다져가는 중이다. 굳이 명명하자면 일종의 품행장애이다. 깊이 사랑했던 토미와 마지막 2개월 간 갈등이 있어 부부관계를 피해왔던 상황에서, 그를 극복하고자 티파니를 위한 속옷 선물을 사들고 돌아오던 길에 토미는 사고로 죽는다. 그의 차 앞좌석에 있던 자신을 위한 선물을 발견한 티파니는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녀의 아픔과 방황은 꼬리표가 되어 티파니를 따라다닌다. 헤프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돌자 마주치는 남자마다 그녀를 함부로 여기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녀를 꺼려한다. 심지어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아들을 둔 팻의 부모님도 팻과 그녀가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제공 네이버 영화

  대체 정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영화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묻는다. 명백하게 비정상이라 여기는 두 주인공에 대한 폭력적인 구분은 아주 우스꽝스러워진다. 그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주변인들 중,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다.

  팻의 아버지는 팻 못지않은 폭력성과 미신에 대한 맹신, 그리고 불법 스포츠 도박에 전재산을 거는 사람이다. 그의 형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면에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듯한 그이지만,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동생더러 "넌 직업을 잃고, 난 승진을 하고. 넌 이혼을 당하고, 난 약혼을 하고. 넌 집을 잃고, 난 집을 사고."라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스포츠 경기에 광기를 보이기도 한다. 이때 더 어른스러운 포용력을 보이며 형을 지키는 건 팻이다. 팻의 친구 로니는 겉으로만 행복한 척 가정을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며 홀로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는가.

  자신들은 정상이라 여기며 팻과 티파니를 마음껏 판단하는 이들 사이에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어느 하나 정상은 없다고. 그러나 정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마치 팻처럼. 팻이야말로 티파니를 단죄하는 사람이니까.

제공 네이버 영화

  정상이 되고자 하는 팻 역시 비정상과의 구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티파니를 향해 내뱉는 무례하고 폭력적인 말들, 사회성이라고는 없는 캐릭터이기에 가감 없이 보여주는 비정상에 대한 구분이 우리에게 당연했던 것들을 이질적으로 만들어준다.

  쉽게 잠자리를 하는 여자라고 티파니를 비난하고, 팻과 티파니가 서로 비슷하다는 그녀의 말에 발끈한다. 그의 모습에 티파니는 일침을 날린다. 나의 과거에는 잘못된 모습들이 있었고, 그마저 여전히 자신의 일부겠지만 자신을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한다고. 그러는 당신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냐고. 용서할 수 있냐고. 팻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는 정신병원을 퇴원한 이래 쓰레기봉투를 입고 정상이 되기 위해 조깅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을 좋아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고통스러운 기억에 얽매여있을 뿐이니까.

제공 네이버 영화

  팻을 위해 티파니는 니키와의 친분을 이용해 팻의 편지를 전달해주겠노라 거짓말을 한다. 그리하여 그 대가로 댄스 파트너가 되어달라 청한다. 만남 한 번, 대화 한 번마다 우여곡절이 많은 이들에게 2차적인 '언어' 대신 매개가 되어주는 것은 '춤'이었다. 감정 불구와 같은 팻에게 티파니는 감정을 가르친다.

  말을 통하면 꼬일 마음들이,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몸으로 소통하며 전달된다. 그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말로부터 시작되는 그 모든 구분들, 존재를 규정짓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그것만이 그들에겐 진실이다. 더욱더 높이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 없이, 최상의 모습만을 바라며 서로를 바꾸려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금 느끼는 그대로 주고받는다.

제공 네이버 영화

  그들은 서로에게 치유자였다. 정신과 의사보다, 친구나 가족보다,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보다 가장 큰 치유를 선사한다. 티파니는 팻의 무례함과 서투른 표현방식을 이해하고 감정을 알려주어 그를 현재로 데려온다. 과거를 보내고 현재와 자신의 감정에 눈을 뜨게 된 팻이 티파니를 잡아준다. 그토록 기대하며 준비했던 댄스 경연대회에 니키가 나타나자 티파니는 당황한다.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까, 팻이 떠나버릴까 두려워지자 그녀는 벗어나려 했던 예전의 모습을 돌아가려 한다. 

  그 순간 그녀를 스스로로부터 구해내고, 그녀가 내뱉은 모진 말도 이해하며 팻은 경연 무대 위에서 그녀를 리드한다. 그리고 달려가 고백한다. 티파니가 니키의 편지로 자신을 속인 것을 알면서도 그냥 속아주었다고. 그것이 미친 자신을 위해서 미친 짓을 해준 것임을 안다고. 그리하여 고맙다는 가장 로맨틱한 고백이다. 

제공 네이버 영화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마주 보기까지 그들에게는 조금 더 길고 복잡한 여정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비정상이라 끝까지 규정지을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어느 평범한 커플보다도 깊게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위로한다. 비정상의 두 사람, 미친 두 사람이 만나서 이뤄가는 관계는 정상보다 위대하다. 남들은 7,8점을 받는 댄스 경연대회에서 5점을 받고 환호성을 지르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영화는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기준, 남의 시선보다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전부라고.


  상처 받은 치유자. 이 말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비정상이다. 그럼에도 도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한다. 비정상을 꽁꽁 감추고 벗어나려는 강박으로는 타인과 나를 판단할 뿐이다. 그러한 구분이 얼마나 오만하고 볼품없는가. 모두 어느 한 구석 고장 나고 생채기 난 채 낡아갈 뿐이다. 그런 삶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자가 되어줄 수 있다면, 팻의 아버지 말처럼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 삶이 준 기회니까. 


  상처를 치유하는 건 흠집 없는 깨끗함이나 완벽함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상처 받은 비정상이다. 나의 상처와 당신의 상처가 만나면 우리가 치유된다.




by Ulim

매거진의 이전글 용서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