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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lim Jan 13. 2019

타자를 다루는 영화의 윤리

<오아시스> 리뷰

#정상과 비정상, 그 속에 상처 받은 치유자

- 1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사랑하기에, '알맞은' 노력으로 https://brunch.co.kr/@dldnfla0700/7

- 2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미친 날 위해서 미친 짓을 한 거죠. 고마워요." https://brunch.co.kr/@dldnfla0700/17

- 3편: <오아시스>


제공 네이버 영화


  3년 전부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주제로 3편의 영화를 묶어내려 했다. 오래 걸린 이유는 바로 마지막 영화 <오아시스> 때문이다. 깊이 감동받아 열심히 공부했던 영화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나의 감동에 의문이 들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대해 고민할 수록 이 영화에 감동받은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그리하여 앞의 두 영화와는 다르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 영화를 바라보며 느꼈던 나의 생각을 과정대로 담고자 한다.


제공 네이버영화

# 종두와 공주는 서로에게 오아시스였다.


  종두는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의 언행에는 도무지 사회화가 된 구석이 없다. 상대와 대화를 할 때 우리가 눈치껏 조심하는 부분들, 배려라고 여기는 일말의 상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온도도 없이 있는 그대로 그를 담아내기 때문에 우리는 불편해진다. 저 주인공은 왜 저러나,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할 이유도 없다.


제공 네이버영화

  그런 종두를 궁금해하는 유일한 존재가 공주이다. 편견 없이, 종두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통용되는 상식에서 벗어난다고 낙오시키지 않고, 종두의 사고방식, 대화방식에 맞춰간다. 영화의 포스터에 나와있듯이 '누구보다 맑은 눈을 가졌다'는 공주에 대한 설명은, 비록 그녀의 육체에 불편함이 있더라도 그녀의 영혼은 누구보다 지혜로움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영화를 따라가며 공주의 도움을 받아 종두를 이해하게 되지만, 공주는 처음부터 종두와 소통할 줄 아는 인물이다.

  종두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공주를 대하지 않는다. 종두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공주를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같다는 점에 그 근거가 있다. 일명 정상적인 사람들은 공주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것이 공주의 전부일거라 생각한다. 그러한 공주는 '다른' 사람으로, 비정상으로 낙인 찍힌다. 그러나 종두에게 공주는 한 사람이고 여자일 뿐이다. 그는 사랑하게 된 여자를 위해 헌신할 뿐이다.


제공 네이버영화

  <오아시스>가 공주와 종두의 사랑을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소재 중 하나가 '나뭇가지 그림자'이다. 홀로 지내는 공주의 침실에는 창문 밖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앙상한 나뭇가지 그림자가 공주를 공포에 떨게 한다. 공주를 성폭행한 혐의, 정확히 말하면 오해로 인해 종두가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에 종두는 그 나뭇가지를 잘라내어 그림자를 없애준다. 자신이 함께 하지 못할 시간 동안, 공주가 편히 잠들 수 있기 위한 종두의 선물이다.


제공 네이버영화

  그들의 관계가 진행되고 감정이 쌓였을 때, 그리하여 우리가 종두와 공주를 이해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에서 영화의 절정은 종두가 가족들과 경찰들 앞에서 나무를 잘라내고, 공주는 자신을 위한 종두의 선물에 라디오를 크게 틀어 응답하는 장면이다. 배경음악 하나 없이도 이 장면은 관객의 마음을 흠뻑 울린다.


제공 네이버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 <오아시스>는 살짝 결이 다르다. 앞의 두 영화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흐트러뜨린 뒤 모두가 비정상이라는 점에서 일침을 가한다면 <오아시스>는 두 주인공에 가해지는 폭력의 자리에 관객을 데려다 앉힌다. 

  처음 종두를 인식하던 우리의 판단, 공주의 적나라한 육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편견들은 주변 인물들로 형상화된다. 극이 진행되고 관객은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 수록,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폭력적인 시선은 가혹해진다. 그리고 그 가혹한 인물들이 곧 우리와 다름 없음을 성찰하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감동적일 수록 우리에게는 묵직한 괴로움이 생긴다. 저들을 압박하는 차가운 세상이 곧 나 자신임을 알게 되니까. <오아시스>는 "이거 봐, 우리는 모두 비정상이고, 비정상은 아름다울 수 있어."보다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비정상으로 규정짓는 나'에 대한 충격이 여운으로 이어진다.


제공 네이버영화

  이러한 이성적 성찰의 공간은 영화적 기법으로, 서사적 장치들로 마련된다. 종두와 공주의 진실, 즉 그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주고 받는 순간들은 환상적 장면으로 연출된다.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영화의 현실적 분위기에 이러한 환상적인 장면의 삽입은 이질적이다. 영화 서사가 탄탄해야 관객은 극적 환상, 다시 말해 허구의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하는데 의도적으로 그 이입을 깨뜨리는 것이다. <오아시스>는 환상과 현실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는다. 환상의 씬(scene)들이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에, 환상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두 주인공의 진심을 목격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들의 진심을 이해하지 않는 차가운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문제 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제공 네이버영화

# <오아시스>의 폭력성

  <오아시스>에 대한 많은 연구들 중 작품에 대한 강력한 비판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중 두 가지 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공 네이버영화

  공주가 처해있는 물리적 상황은 소수자에 해당한다. 소수와 다수를 구분하는 것 역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양되어야 하지만, <오아시스>에서 공주를 다루는 방식은 다수의 폭력성에 머물러 있다. 공주와 종두의 사랑이 깊어지는 지점들은 환상으로 표현된다. 이때 공주는 불편한 몸이 아닌 비장애인의 모습을 취한다. 휠체어 없이 걷고, 춤추고, 노래하고 말한다. 이러한 환상적인 장면들이 두 주인공의 사랑을 표현하는 핵심적인 장면인데, 이러한 부분에서 공주의 진심이 있는 그대로 그녀의 모습이 아닌 '정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이러한 비판은 조심스럽다. 실제 장애인들의 소망은 몸의 불편함이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허구적 이야기이다. 내가 아닌 타자를 다루는 가상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는 윤리적 의무를 가진다. 공주가 비장애인의 모습을 하고 종두와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안타까움은 결국 공주가 장애인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왜 꼭 공주는 비장애의 모습으로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표현되었는가. 그것은 철저히 다수의 시선으로 소수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닌가.

제공 네이버영화

  다른 하나는 영화가 공주를 성적 주체로 그려내는 방식이다. 극 초반, 종두는 공주를 성폭행하려 한다. 이에 공주가 발작을 일으키자 종두는 정신을 차린다. 종두는 법적으로 공주의 부모를 죽인 사람이다. 실제로는 종두의 형이 범인이고, 종두가 형을 대신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 온 것이지만 공주는 초반에 이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남자가 자신을 성폭행하려고까지 했는데, 종두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사람은 공주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처음으로 자신을 여자로 봐준 유일한 사람이 종두였다고 공주가 먼저 종두에게 다가가는 것이 성적 주체로서 공주를 그리는 것인가? 심지어 공주는 그러한 종두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나중에 합의 하에 진심으로 사랑을 나눈다. 이것을 공주의 가족에게 들켜 종두는 성폭행범으로 몰린다. 그것이 가슴 아프지만, 종두가 성폭행이라는 죄 앞에서 자유롭진 않다. 영화는 그러한 사실을 지나쳐 공주에게 헌신하는 종두의 사랑을 깊이 있는 영웅으로 만들어준다. 사랑을 시작하는 데 올바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애초에 사랑을 하는 주체로서 공주에게 주어진 상황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녀가 처음 성이라는 것에 반응하는 장면도 가히 폭력적이다. 돈을 받고 공주를 돌보는 옆집 부부는 공주의 집 거실에서 성관계를 가진다. 그들에게 공주는 투명인간이다. 아니,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방에서 적나라한 옆집 부부의 성관계 소리를 들으며 공주는 어떤 반응을 보인다. 립스틱이라는 의미심장한 물건을 들고. 이러한 장면은 단순히 공주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상황을 그려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가 어떠한 변화를 맞이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제공 네이버영화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묻고 싶다. 공주와 종두의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면, 당신은 과연 공주를 진정한 한 인격으로, 온전히 존중받는 타자로 여겼는가. 정상인이 되고 싶었던 비정상인으로 끝끝내 규정짓고 쉽게 동정한 것은 아닌가. 

  이 영화가 거북했던 사람이라면, 과연 소수에 속하는 타자를 다루는 올바른 방법이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오아시스>는 부족하나마 종두와 공주를 탄압하는 세상에 일침을 날린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아쉽게라도 어떤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은 것일까.



  영화는 세상에 나온 뒤부터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창작물이지만 한 영화가 개인에게 선사하는 영향력은 감독의 몫에만 달려있지 않다. <오아시스>의 공주가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며 나아가 현실 속에서 공주가 설 자리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영화의 윤리를 고민하는 관객의 윤리이지 않을까.



by U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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