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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lim Jul 09. 2021

유니콘을 믿기로 선택하는 삶

넷플릭스 오리지널 <유니콘 스토어>

  내 20대의 원동력은 불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의 효용성에 대한 불안. 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내 삶을 책임질 수 있을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부족한 나에 대한 열등감, 나의 순진과 무지에 비해 거대해 보이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 "네가 어려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 그런 말들은 나에게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어른에 대한 동경을 동시에 가지게 했다. 결국 날 움직이게 했던 건 불안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했다. 밥벌이를 하고, 세상에 대한 기대보단 실망이 더 커졌고,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된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는 허무가 깃들었다. 세상도 삶도 엄청난 것은 없었다. 대단한 건 주로 선보다 악이었다. 삶의 허무 앞에서 깊은 우울이 찾아왔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유니콘 스토어>에 대한 대부분의 감상은 '어른 아이'를 위한 '성장 드라마'라는 의견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한 끗 특별한 점이 있다면, 주연이자 감독인 브리 라슨이 말하고 싶었던 '성장'은 불안을 지나 허무에 당도한 삶의 국면에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소망이 필요하다면, 그건 내가 무엇을 믿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믿음은 선택이다. 나는, 내 삶은, 이 가치를 믿기로 선택한다고. <유니콘 스토어>에서는 사람마다 다른 각자의 가치가 유니콘으로 비유된다.


  이 영화를 처음 본 몇 년 전부터,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된다면 이 영화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왔다. 내 삶의 기반을 내가 선택하는 과정에 응원이 되어준 영화를 나눈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주인공 키트는 어릴 적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알록달록한 색들에 반짝이가 가득 끼얹어진 그녀의 작품 세계는 사회의 평가 앞에서 무참히 깨져버린다. 몰입과 행복의 얼굴로 온몸에 물감을 묻힌 채 붓질을 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교수를 마주하는 순간, 화면은 심사장 전체의 공간을 비춘다. 캔버스를 벗어나지 않은 무채색의 정형화된 그림들. 키트의 그림이 대조적인 만큼, 키트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처참했다.


  미술이 전부였던 만큼, 키트의 상처는 컸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견디느니 더 이상 그리지 않기로 선택한다. 키트는 그림을 그만두고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무력감에 젖어 며칠을 소파에 누워 지낸다. 걱정하는 부모님에게도 심드렁한 채. 키트는 스스로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인정받고 싶고, 그렇기에 자신이 사회적 인간으로 기능하길 원한다. 그런 그는 소파에 누워 무력한 날들을 보내던 중 TV에서 인력 업체 광고를 보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던 알록달록한 색을 버리고 무채색 정장으로 차려입은 키트는 인력 업체에서 알선해준 한 광고 회사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로 출근한다. 출근 첫날, 부모님께 당당하게 자신도 이제 사회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며 선언한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첫 직장은 마치 키트의 그림을 냉혹하게 깎아내리던 시험장 같은 곳이었다. 무채색 정장을 입은 회색 인간들로 채워진, 정형화된 프레임 같은 파티션을 구획 삼은 공간. 그곳에서 온갖 서류의 복사를 담당한다. 끝없는 복사기 업무 중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손을 프린트하는 엉뚱함을 보인다. 복사기 앞에 서서 일을 하는 그녀에게 부사장 게리가 접근한다.


  한 직장에서 부사장이라는 직급을 가진 그는 어딘가 묘하고 나사 빠진 사람 같아 보인다. 판타지스러운 영화의 분위기 때문에 자칫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전형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사회초년생 어린 여자에게 기회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집적대는 남성이다.

  어릴 적 꿈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하늘을 날고 싶다고 날 수 없으니, 네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 평생 임시직으로 살고 싶진 않잖아?"라며 자신의 실패에 대한 열등과 그것을 무마하는 권위를 내세운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어릴 땐 몰라도 나이가 들어서는 순진이 죄라고들 한다. 어련히 눈치껏 다 알고 처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 역시 고백하자면, 게리와 키트의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상당히 불편했다. 여전히 키트는 만화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판단했고, 게리의 음흉에 그대로 당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시선 역시 편견임을 깨닫게 한다. 키트의 취향으로 인해 키트를 순진하다고 판단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는 게리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에게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영화의 중반부에 버질에게 "우리 부사장이 날 성희롱해."라며 툭 털어놓는 장면을 통해서, 그는 무지하지 않고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인격체임을 시사한다.

  회색 세상 속에서 회색 인간들을 겪으면서도, 자신은 알록달록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 아닌가. 회색 중에 가장 나은 회색이 되는 것이 자신이 바라던 바가 아니라면.



사진 제공 넷플릭스

  게리의 권유로 키트는 진공청소기 광고를 기획하게 된다. 게리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이용하여 키트에게 희망을 줌으로써 자신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며 아이디어를 준비하던 키트에게 어느 날, 편지 하나가 도착한다. 발신인은 The Store. The라는 관사가 붙으면서 이 상점은 그냥 상점이 아니게 된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판다"는 메시지에 이끌려 키트는 상점 주소로 향한다.


  거기엔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하는 The salesman이 유일한 직원으로서 상점을 지키고 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진정으로 바라 왔던 것은 바로 유니콘이라는 키트의 말에 그는 유니콘을 가질 수 있다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유니콘은 널 영원히 사랑해줄 거야!" 키트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상점을 도망쳐 나온다. 곰곰이 생각하던 키트는 사무용품 상점 직원을 붙잡고 질문을 하다가 이내 깨닫게 된다.


"제가 방금 뭘 봤는데 진짜라고 믿어지진 않지만, 진짜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진짜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예수님처럼요?"
"... 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보인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하죠. 예수님이 길을 막 걸어 다니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신자들은 정말 믿죠. 진정한 신자가 진짜라고 믿는다면 누가 손가락질하겠어요?"

  유니콘을 신격화하거나 종교의 논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다고 선택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을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믿기로 선택하는 것을 존중할 줄 안다. 그리고 키트는 유니콘의 존재를 믿기로 선택한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키트는 스토어로 돌아가 유니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한다. 유니콘을 키울 능력이 된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조건들이 필요했다.

  유니콘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하고, 먹이를 마련하고, 행복한 가정환경을 조성하는 일.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영원한 사랑을 준다는 유니콘을 믿고, 유니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키트가 진정으로 자신을 찾고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과정이다. 자신이 일상을 보낼 거처를 마련하고,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 것.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의식주의 영역.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내면의 능력.


사진 제공 넷플릭스

  키트는 유니콘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 철물점 아르바이트생 버질의 도움을 얻는다. 그들은 함께 키트 집 마당에 유니콘 헛간을 짓고, 유니콘이 먹을 건초를 구하며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진다. 유니콘을 맞이할 생각에 들뜬 키트는 본래 자신의 모습이다. 버질은 그런 키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사랑한다.


  키트는 직장생활과 유니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이 부정당했고, 자신을 실패자로 낙인찍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뾰족함은 주변 사람들을 마구 찔러댔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지만 스스로 못나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주는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기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니까. 그 뾰족함은 부모님을 찔렀고, 버질을 밀어냈다. 사랑이 가득한 가정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키트는 삐걱댄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부모님이 운영하는 청소년 치유 프로그램에 따라간 키트는, 큰 상처를 숨긴 채 거짓된 모습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너무 큰 아픔 앞에서는, 진실보다 거짓이 감당하기 쉬우니까. 너도 그렇냐는 아빠의 말에 키트는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짓된 모습들로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키트의 그림을 멸시한 교수는 저명한 작가였다. 평단의 극찬을 받은 그의 작품은 다른 각도로 보면 전혀 대단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대단한 작품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바보 같은 것.

  자신을 재단하고 평가한 사회의 시선 앞에서, 키트는 그 시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교수의 얼굴 사진에 낙서를 하고, "키트 나는 바보야!"라는 말풍선을 그려 넣은 뒤, 구석에 숨겨 두었던 어릴 적 자신의 그림들과 미술도구들을 다시 꺼낸다.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아픔을 보듬어 다시 진실된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오래 준비하던 진공청소기 프레젠테이션에 키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환상, 마법, 반짝이 등을 잔뜩 담은 콘셉트로 피칭을 한다. 회색 세상의 선택은 당연히 해고였다. 애초에 게리는 키트에게 진짜로 발표를 시킬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광고주는 아름다운 여성 주부가 나오는 상업의 논리를 선택했다.

  하지만 키트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친구들은 그 발표를 멋지다고 인정해주었고, 회사 고위직들의 평가와 해고에도 키트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 이제 자신의 인생에선 남의 평가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으니까.


사진 제공 넷플릭스

  부모님과 화해를 하고, 버질과도 관계를 회복한 키트는 유니콘을 맞이할 일만 남겨두었다. 유니콘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간 키트는 유니콘을 만나게 되었지만, 유니콘을 가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어서, 행복과 추억을 안겨줘서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눈물로 유니콘을 안아주곤, 자신은 이제 괜찮다며 유니콘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라고 한다. 그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고. 자신의 진가를 몰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방황하지 않게 곁을 지켜주라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네가 변함없는 사랑을 주라고. 그리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키트는 유니콘을 믿는 삶을 선택했다. 유니콘을 보냈지만 키트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유니콘을 믿는 것은 키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인정해주는 일이었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가 자신에게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그 믿음, 자신을 믿기로 선택한 그 믿음은 영원히 키트 곁에서 키트를 잡아주고 사랑해주고 지지할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갈수록 심플해지고, 그렇다고 삶에 찾아오는 모든 불행과 아픔에도 심플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진 않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그 막막함 앞에서 <유니콘 스토어>는 기분 좋아지는 환상으로 가장 현실적인 공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을 믿기로 선택하는 삶의 태도. 그 태도를 가진 나.


  날 증명해야 한다는 불안을 지나, 실망과 타협을 반복하며 어딘가에 날 맞춰 살아가는 허무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건 단 하나. 내가 어떤 가치를 믿을지 선택하는 힘. 그리고 그걸 선택한 나 자신. 그것만이 날 지켜주고 날 구성할 테니까.



오랜만에 다시 쓰려합니다.

by U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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