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이 돌아가셨다. 원주에서 부산까지 단걸음에 갔다. 장례식장에서 이틀을 머물고 집으로 가려고 한다. 손주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할아버지를 당분간 집에 오시지 말라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일흔인 나를 집에서 못 오게 하면 어디로 갈까. 손주들을 돌보는 아내를 만나면 안 된다는 이유이다.
이틀 잠을 설쳤더니 몸이 곤하다. 그런데도 새로운 여정을 잡아야 한다. 전에 살던 진주로 향한다. 아는 이들과 저녁을 먹고 카페로 간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일어난다. 자리를 비켜주는 것 같지만 우리를 피하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 말고는 마스크를 쓰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얼마 전 서울 어느 카페에서 마스크를 썼던 직원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있던 손님들은 코로나에 걸렸다는. 그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어 마스크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코로나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는 있지만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 면역력을 높이는 음식을 잘 챙겨 먹고 신체활동을 많이 하면 이겨낼 수 있을는지. 사람들이 두려움에 지쳐 간다. 코로나에 걸렸다가 낫는 사람들은 후유증이 심하다는데. 무슨 병이 들어왔다 나가면 되었지 뒤끝까지 있나. 그것이 더 겁난다. 실체를 모르니 서로 간에 의심이 생긴다. 누가 숙주로서 역할을 하게 될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주변에 코로나 확진 자가 아무도 없으니 모두 뜬구름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별 이야기인 듯도 하다. 너무 과장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들고. 이래저래 마음이 불안하다.
집 떠나 온 지 며칠인데 금요일에나 올라오란다. 토, 일 동안 아이들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집에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없던 힘마저 빠진다. 하필 코로나 시대에 별나라로 간 열두 살 위인 큰 형님이 원망스러워지려고 한다. 조금 더 일찍 가시든지 잠잠해지면 떠나든지 할 것이지. 하필 전염병이 악다구니를 부릴 때 갔을꼬. 오늘 하루 누구를 만날까. 식구들이 거부하는데 다른 이들은 만나도 될까. 그렇다고 혼자 맥없이 있을 수도 없다.
처음부터 아들네와 살지는 않았다. 위에 문제가 생기면 서부터이다. 입구에 큰 덩어리가 하나 생기더니 고통스럽게 했다. 부부는 겁이 났다. 서울에 있는 병원 다니기도 힘에 겨웠다. 둘이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무서움이 와락 달려들었다. 며느리는 첫 손녀를 낳아 어느 손길이라도 빌려야 되는 시기여서, 아기를 돌보아주러 올라오라던 찰나였다.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춘천에서 직장을 다니는 며느리여서 호반의 도시에 늦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몸은 괜찮아졌다. 서로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가까이 있음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다. 독불장군은 없다. 겸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가. 누가 세월을 거스를 수 있으며 다가오는 끝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아내가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과 집을 정리했다. 몇십 년 살았던 동네를 떠났다. 아들 집 근처에 아파트를 장만했다. 눈을 뜨면 아들네 집으로 출근하여 손주들을 돌본다. 손녀 둘에 가운데가 손자이다. 고물고물 한 것들이 자라는 재미에 푹 빠졌다. 아내가 고생이다. 젊었을 때도 하지 않던 밥 심바람을 하느라고. 요리하기를 좋아하던 사람도 나이 들면 힘들어하는데 이 입맛 저 입맛을 골고루 맞추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내는 올빼미 형이었다. 늦게까지 책 보고 글 쓰던 사람이 아들 하나 낳아서 키웠다. 아들이 서울로 가고 난 뒤에는 밥은 부부가 알아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핏줄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아이들이 자라면 나아질까. 시간이 가기만을 바란다. 벌써 큰 손녀가 초등학교 이 학년이니 한 오 년만 고생하면 될까. 그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들 옆에 있어야지. 젊을 때도 떠나지 않았던 고향과 멀어졌다. 사람이 어디에 살든지 맘 붙이고 사는 곳이 고향이라고 했던가. 며느리 직장을 따라 다시 이사한 강원도 원주에 코로나 확진 자가 여럿 나왔다는 뉴스가 나온다. 언제 집으로 갈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