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것을 배운다

by 민진

남해 상주 은모래비치에서 대국이 열렸다.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지난번에 갔던 곳이라고 한다. 반가워서 살펴보니 낯이 설다. 모래벌판이 훨씬 넓어 보이고 수평선 가운데 떠 있는 뾰족한 섬이 새롭다. 그곳엔 정물처럼 커다란 배가 떠 있었는데. 무작정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전화기로 검색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올려놓은 글과 사진을 보니 다르다. 바둑대회가 열린 곳은 출입금지라고 말했던 상주해수욕장의 딴 이름이다. 은모래 비치라니 전혀 다른 곳 같아서 깜빡 속았다.

전국 아름다운 해변으로 은모래비치 해변과 솔바람해변이 선정된 적이 있다고 나와 있다. 남해바다가 아기자기한 맛이 있긴 하다. 남편에게 아닌 것 같다고 하자 지지 않고 지도를 그린다. 여기가 상주해수욕장이고, 이곳이 하늘 바람 해변이라고 말까지 바꾼다. 솔바람으로 바로 잡아준다. 반대로 그리는 것 같다고 하자 남편이 컴퓨터를 켠다. 서로 자기가 맞는다면서. 보물섬 남해의 지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기를 해야 하는데 기회를 놓쳤다. 아깝다.


얼마 전 추석특집으로 내 보냈던 바둑 프로그램을 다시 보여주었다. 마치면서 바둑 홍보대사인 김장훈 씨의 한마디 말이 내 머리를 땅 때렸다. 바둑은 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모든 배움이라는 것에는 복선처럼 이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던가. 지고만 사는 것 같아서, 손해 보는 듯 억울해하며 살아왔다. 정정당당히 지는 것을 배웠다면 더 풍요롭고 너른 마음으로 살지 않았을까. 이기는 것과는 늘 거리가 멀었다. 출발점이 달랐는데 결과가 같기를 원하는 것도 자기기만이 아닐까 싶다. 현실은 외면하고 좋은 위치만 주어지지 않는다고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늘 저울질하며 살아온 인생인 것 같다. 순수하게 삶으로서의 살음이어야 했다. 대립각을 만들어 휘둘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우위에 서지 못하면 좌절하고 비워내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했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저본 사람만이 진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동안 이기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으니 얼마나 고되고 힘이 들었을까. 수치를 재고, 평수를 재고, 통장의 돈이 얼마인지 몰라야 부자라고 하는 시대이지만. 같이 그래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비교하지만 않으면 훨씬 부요하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결국은 져준다는 것도 속내는 이기는 것에 있다는 것인가 싶어 아득하다. 진다거나 이기느냐에 의미를 두지 않을 때에야 진정한 승자가 아닐까. 경쟁의 대상이 아닌 삶을 연대해나가는 것이라면, 누가 하나라도 더 잘하는 것이 맞을뿐더러 고마운 것이다. 성숙의 문제일까. 성숙이라는 것을 여러 잣대로 말할 수 있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마음에 품어내느냐 일수도 있겠다. 자신을 내려 깔지 않는다면 마땅히 다른 이에게도 같은 시선이 머물 것이다.


일요일 오후면 남편과 산책을 한다. 이번에는 강 건너 새로 생긴 마을로 정했다. 야트막한 산과도 이어진 길이다. 가을이 되니 아담하게 지어진 집들의 윤곽이 훨씬 잘 드러난다. 억새가 하얗게 바람에 흔들리고, 올망졸망한 꽃들이 다채롭다. 울타리로 심은 로즈메리는 향내를 밀어 올릴까. 공원이 뜰이고 마당이며 집인 곳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 살 수 있을까. 잎이 큰 중국단풍들이 울긋불긋 먼저 익겠다고 눈시울을 붉힌다.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커다란 창문으로 밀고 들어갈 것 같다. 집 앞으로는 개울처럼 강이 흐르고. 딴 계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돋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나무마다 살짝 부끄러워짐이 못내 어여쁘다.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한 공간을 내 것으로 가지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살그니 일어난다. 소롯이 내 것을 가져보지 못한 그늘이 오늘 정면으로 부딪쳐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런 것들이 지고 살아온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저들은 이겨온 삶의 주자들인가. 마음먹은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것이니까. 부러움은 부끄러움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나무들이 떨켜층을 만들어 청춘 같았던 초록의 잎들을 떠나보내려 한다. 햇빛을 모으고 양분을 만들어 뼈마디와 힘줄에 보내기를 마지않았던 제 몸 제 핏줄을. 팔처럼 나부끼는 것들을 훌훌 떨어뜨려야 한다. 그냥 보내기 뭣해서 살포시 물들이는 중이다. 나도 나무에게서 배우련다. 떨궈낼 것은 떨궈내고, 잠잠해질 것은 재우고, 속만은 이쁜 색으로 칠하면 좋겠다. 잎 지게 하는 나무처럼 비울 것은 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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