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주름

by 민진

청둥오리들이 강물 위에 조각배처럼 떠 있다. 물속이 훤히 비춰 주황색 발의 노 젓는 모습이 내다보인다. 발길질에 따라 몸이 앞으로 나아가고 물 주름이 밀려난다. 햇빛을 받아 살짝 윤슬이 입혀지기도 한다. 아무 걱정 없이 맑은 물속을 흐르는 것 같다. 그림처럼 떠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맥없이 바라본다.


설을 앞둔 수요일. 일주일에 세 번씩 나가서 하던 일을 무지르고 나온다. 다 얘기된 것이지만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나온 듯이 쭈뼛거리는 마음이 무겁다. 눈치가 보인다. 앞으로 잘하면 된다고 생각을 다잡지만 쉬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딸들은 구정 일주일 뒤에나 내려온다고 용돈을 보내왔다. 남편에게 알리지 말까 하다가 이야기를 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비밀이 없어야 된다는 생각에 지배당한다. 주로 책방에 가고, 봄맞이꽃을 사고, 이쁜 그릇 한 두어 가지 마련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동났다. 남편은 뭔가를 살 때마다 돈을 내라고 주문한다. 딸레미가 기백만원 보내온 것도 아닌데.


한동안 말을 안 한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 속상해서 그런다고 속엣말을 했다. 미안하다면서도 보내준 것이 얼마인데 벌써 없느냐다. 다 필요한데 썼지 엉뚱한데 썼을까 봐 그러냐고 대꾸한다. 꽁하고 있으려다가 속 끓이면 나만 손해지하면서 푼다. 작은 일들에서 마음이 말리어 감긴다.

맘속이 때를 따라 잔물결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갈무리를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하리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야 먼 산 보기처럼 그렇겠거니 하며 지나갈 수 있다.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서 영향을 쉬이 받는다. 쉬운 길을 택하여 타협점을 찾는다. 내 뜻보다는 상대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마음을 다 잡다 보면 자꾸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의견 다툼이 있으면 내쪽에서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이제는 뚱하고 있으면 거꾸로 남편이 못 견뎌하고 사과해온다. 한두 번 경험을 하다 보니 재미가 붙는다. 마음 주름을 펴는 방법 하나 마련되었나. 억울함이 풀리고 속이 후련하다. 반대로 남편의 마음에 주름살이 늘려나. 너무 자주 써먹으면 곤란하겠다.


살아가는 것은 마음을 나눠가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본디의 내가 꿈틀거린다. 바로잡는 것이 쉽지 않다. 시기와 질투라는 이무기가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빤히 쳐다본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을 곧잘 잊어버린다. 쉬운 것이었다면 기록도 안 되었겠지.


퍼지며 옅어져 가는 물 주름처럼 내 안의 구겨짐도 다리미로 편 듯 곧게 하고 싶다. 그러면 고운 마음 예쁜 마음이 절로 돋으려나. 깊숙이 들여다보며 사노라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내걸어도 될까. 바로잡는 기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쉽지 않음을 순간순간 느낀다.


오리의 발놀림에도 잔물결을 만드는 강물은, 부드러운 물살로만 되어 있어 상처가 상처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아예 주름이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작은 돌멩이의 부딪힘에도 파르르 한 떨림.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든다. 흐름에 내어 맡기는지도 모른다. 은은하게 퍼지는 선율. 물 선을 언제 그었는지 흔적이 남지 않는다.

내게 진 속 주름도 시간이 지나면 펴지려나. 다른 것들로 덧씌우기 되어 잊어버리는 일상 인지도 모른다. 순간의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더 나은 나로 자리매김을 위한 것이다.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여물어지는 것처럼 단단한 나로 서면 좋겠다. 항구에 배가 부서지지 않도록 나래비를 선 타이어들처럼 처음의 모습을 늘 회복하는 탄력성을 가지고 싶다.


퍼져나가는 물살에 하염없이 마음을 실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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