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기린처럼

by 민진

얼굴만 한 잎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다. 바라다보면 길 위의 손님처럼 넓적한 가을이 눈을 맞추었다. 먼 나라를 거닐 듯 낯선 느낌을 떨칠 수가 없는. 그것이 좋아서 다 지나온 거리를 돌아갔다가 되감아 오는 것이 몇 번째였지. 무심한 듯 그렇게 거리를 걷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어.


이파리들이 푸르르 날개처럼 날아 내리면 나무는 방울을 흔드는 작은 그림자만 무성하고. 우람한 몸에 비하면 열매가 왜 그리 앙증맞은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어.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커다란 알맹이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지는 얼마 되지 않아.

찬란했던 여름날의 무성함을 잊지를 못해. 삼층 창문으로나 마주할 수 있던 너. 너른 잎들이 지나는 바람에 나붓나붓하는 감이 좋아 자꾸만 쳐다보았어. 잎사귀들이 속살거리는 말은 알아듣지를 못하고.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이 분명해.


나무의 여왕으로 대접받는 것이 자작나무라지. 수피가 하얀 나무 숲길을 거닐면 어떨까. 가녀린 둥치와 곧은 선에 맞물린 잎들의 떨림이 전해져 와. 줄줄이 하얗게 서 있는 그곳에 서면 나도 나무가 되고 싶을 것 같아. 나무눈이 내리듯 마음마저 무채색이 될지도 몰라.

너는 꼭 하얀 기린처럼 기품 있는 몸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우뚝 서서 가지로만 손짓하는구나. 꼭대기 까마득한 지점에 이르면 기분이 어떨지. 아는 것과 느낌의 차이는 다를 것만 같아. 누구는 하야말갛다고 추워 보인다는데 내게는 우아하여 하뭇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쑥과 냉이를 캐던. 내 고향에선 씀바귀를 사랑부리라고 불렀지. 어린 입맛에는 써서 먹을 수 없었는데 어떻게 그런 고운 이름을 달고 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어. 풀이름 하나라도 정겹게 불러야 덜 고달팠을까. 사랑은 때로 쓰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빗대었을지도 몰라. 인생살이도 어쩌면 그와 같은 이치가 아닐까. 쓴 물을 우려내야 할 때도 있고, 너무 달아 물을 넣어 희석해야 될 때도 있는 것처럼.

희디희게 피어나는 찔레나무의 곁순을 얻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쑤고, 풋보리 베어다가 먹던. 아이들 얼굴에 하얗게 버짐 꽃이 피어나면 한없이 슬펐다는. 너의 무늬가 버짐 꽃과 닮아서 양버즘나무라는.


플라타너스 길을 거닐면. 하얀 기린들이 지긋이 서 있다는 착각이 들어. 그 사이를 오가노라면 숙연해져. 지나온 먼먼 시간의 빛깔들을 다 헤이고 있을 것 같거든. 고개를 젖혀 쳐다보아도 질리지 않아. 신비로워. 백 년을 살아낸 것이 기꺼운 것인지도 몰라. 북한에서는 방울나무라고 부른다지. 이름만으로도 방울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내가 서 있는 공간이 하늘 속이라는 것을 자꾸만 잊어먹어. 그곳은 따로 있다고 믿고 싶은지도 몰라.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붙어 있다는 것을 부러 외면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오늘이 지나면 푸른 내일이 오나. 새 뿌리를 내려 새 잎을 피워내야 할 계절에 서는 거야.

더듬이처럼 손을 내밀어 너를 만져본다. 오돌토돌하니 거죽에 남아있는 기나긴 세월의 흔적. 몸을 안아보고 싶어 온 팔을 뻗으면 너무나 짧아. 눈빛으로만 더듬는다. 하얀 몸으로 찬바람을 견디어 내는 외로움에 오늘도 나는 무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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