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들었던 곳이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다. 눈꽃이 피어있는 나무들. 가로등. 보고 있는 나에게도 차가움이 전해져 온다. 온통 하얗다. 백 년 동안 겨울만 있는 곳.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나니아.
내 어렸을 때 보았던 동화들은 판타지에 가까웠다. 그 기억만 믿고서 아이들에게 그림형제의 그림동화 전질을 사주었다. 기억에 있는 이야기는 그리 잔혹하고 무시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참 열심히 본다는 생각을 했다. 본전이 아깝지 않다고 좋아하기도. 무섭게 원본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해 놓은 것임을 알지를 못했다. 우리의 옛이야기도 읽었지만 아이들 마음은 이미 단단해져 흥미를 가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순서를 바꿔서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영화 첫 부분에서 나이 지긋한 교수는 요즘 얘들은 논리가 없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듣는데 왜 그리 찔리던지. 아이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속말이 차올랐다. 야코죽기 는 싫고 때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기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듯이 논리가 부족하면 목소리가 커지거나 우격다짐이 된다. 큰소리치던 시절은 지난 것 같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곳. 가장 나이 어린 동생이 그 세계에 처음 들어갔다는 것은 순수함에 무게를 실었나.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올 자가 없느니라. 하는 것처럼. 순박함이나 순수는 어리거나 어른이라고 다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질의 문제일까. 선택의 문젠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순수라고 할 수는 없다. 얘리얘리 하다고 거기에 가깝다고 여겨도 되는지. 정반대일 수도.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로 이어지는 한 줄 띠 같다. 뱀파이어 시리즈를 금기시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어찌 그리 잘 알고 있었지. 인생은 주고받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내 생각이 자식들에게로 그들의 젊은 뜻이 나에게로 수혈이 되기도 한다. 트라일라잇 시리즈는 새들이 둥지를 떠나간 뒤에 혼자 보게 되었다. 청소년들이 좋아할 장르였다. 내 마음도 살포시 기울었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무작정 보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바뀌고 있다. 성경은 판타지적인 면이 많음을 본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더 넓은 생각들로 구슬을 꿰듯이 꿰어져야만 될 것 같다.
나누어지는 선과 악의 구도. 우리는 선을 선택할 수 있나. 시대의 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치인가. 상대적인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문학은 무엇을 위하여 있어져 왔는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은 소망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부족한 글을 왜 쓰나. 가차 없는 물음이 떠오른다. 물 위에 떠 있는 새파란 나뭇잎 같은 고요로움을 가지고 싶어서인가. 미루나무의 파득파득임 같이 생기롭고 싶나.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다.
* 위 사진은 영화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