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꽃

by 민진

길가 화단 구석에 숨어서 피어 있는 꽃을 찾아냈다. 이른 봄에 보기 어려운 색이어서 조화인가 생화인가 살펴보게 된다. 할미꽃처럼 고개를 숙인 자줏빛 꽃이다.


딸이 칠월에 작은 전시회를 연다고 하자 전공도 아닌데 그래도 되느냐고 묻는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공예품을 전시해주는 카페에서 그림을 선보이자고 한단다. 무엇을 주 소재로 그릴 것이냐는 물음에 꽃을 그리려 한다기에 산들바람이 살포시 지나는 것 같다.


명자 꽃이 이파리도 없이 빨간 구슬처럼 오롱조롱 매달려 있을 때와 금빛 수선화, 하얀 눈밭 같은 조팝의 물결, 목련의 우아함을 사진에 담아 보낸다. 흔들렸다고 초점을 잘 맞추어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자줏빛 꽃이 크리스마스 로즈라는 것을 알았다. 예쁘다며 화면 가득 나오게 하라고. 화상강의가 있는 줄 모르고 약속을 했기에 남편에게 부탁한다. 보내온 사진을 보니 딸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건물이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다음날 다시 그 곳으로 갔다. 꽃만 나오게 하느라고 애를 쓴다. 쭈그려 앉아서 꽃을 욱여넣어 셔터를 누른다. 차라리 앉은뱅이 꽃이었다면 수월했을 것이다. 한 참을 실랑이해 스무 컷 이상을 보냈다. 건질 것이 없나 보네 했더니 모임 중이었다고 두 개를 골랐다. 고맙게 잘 쓰겠다는 말에 기분이 좋다. 남편이 목련꽃 사진을 보내왔기에 혹시 몰라 딸에게 터치했다. 마지막 사진 너무 예쁘네 이런 식의 꽉 찬 앵글 참 좋아.

그제야 딸이 원하는 것을 짐작해 본다. 학교에 가는 날, 기다렸다는 듯이 머금고 있던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난다. 쉬는 시간에 벌처럼 꽃을 찾아 교내 한 바퀴를 돈다. 딸의 맘에 든 것은 다섯 장이었다. 뭘 원하는지 알 때에야 제대로의 필요를 채워갈 수 있다. 부듯해하고 있는데 전화기 사양이 뭐냐고 묻는다. 대답해 주니 말이 없다. 화질이 너무 낮아 도움이 안 된다고. 나중 전화기를 바꾸어 주면 보내라고 한다.


저가 쓰는 전화기와는 다르지만 그렇게 차이가 날까. 차이가 나더라도 작가의 색을 살려 쓰면 되니 문제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꼭 꽃의 본디의 빛깔을 살려서 그려야만 되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 내 생각에는 모양과 이미지만 보아 내면 될 것 같아서 그것만이라도 참고하라고 해본다.

자식이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생각에서부터 모든 행동거지가 분주해진다. 꿀벌처럼 여기저기 꽃을 보면 사족을 못 쓰고 사진을 남겼다.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할 때 찬바람 한 줄기 지나간다. 할 일 하나를 빠뜨려 버린 듯하는 아쉬움이 차오른다.

작은 것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람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부모이다. 실낱같은 의지가 뭉개질 때 와지는 헛헛함은 갑자기 속이 비어버린 듯하다. 자식에겐 항상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가슴으로 바람이 들랑거린다. 겉은 푸르나 속은 비어있는 대나무처럼. 대는 비어 있기에 더 높이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나무는 모르지만 대나무가 구부러져 있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된다. 자식을 향한 마음은 비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늘 그리움으로 먹먹하기에.


대숲 앞에 서 보았다. 겨울을 지나와서 그런지 더욱 단단한 몸으로 틈 없이 뭉쳐서 하나가 된 응어리. 합창단이 줄 맞춰 서 있는 것처럼 꼿꼿한 기라성의 단정함이다. 지휘자만 나타나면 아름다운 하모니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기대에 찬다. 스스스. 얕은 바람에 잎사귀 소리만 숨소리처럼 들려온다.


고개 숙인 꽃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세월 앞에 조금씩 작아진다. 크리스마스 로즈와 같이 제 계절을 비켜선 빛이 퍼져간다. 느지막하게 피어났기에 더욱 눈에 띈 신비한 꽃. 앞으로 조금씩 바람을 빼는 시간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피어날 수많은 꽃들에게 눈을 맞추고 마음을 주어 차분하게 나를 가라앉혀야겠다. 다시금 숨을 참고 앵글에 가득 차게 초점을 잘 맞추어 꽃과의 사랑을 담아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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