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원의 행복

by 민진

꽃에 대한 영상을 멋모르고 이것저것 보다가 몇 개로 좁혔다. 나이가 얼추 나와 비슷한 이의 유튜브인데 꺼내는 삶의 주제도 동떨어지지 않고, 요긴한 것들을 꼬집어 주는데 대한 무한신뢰를 보낸다. 하루에 십 여분이지만 쉴 때나 하루 마감 시간에 보고 잠이 든다. 끝나기 직전 ‘좋아요’를 누름으로 애씀에 한 표 행사를 꼭 하게 된다.


어느 날부터 흘러나오는 음악 대신에 반주 없이 한 곡조 부르면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자신이 있나 보네 하며 듣는다. 이를테면 찔레를 소개하면서 ‘찔레꽃 피고 지는 남쪽나라 내 고향’ 이라든지 그날그날의 이야기에 맞는 노래를 선곡하여 한 소절 들려주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처음은 낯설었지만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즐긴다.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노래를 잘하는 것이기에 대리만족이 된다.

그날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것 같은데 뭔가 뾰족뾰족 가시 도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목소리야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차분하지만 야단을 치는 듯하다. 영상을 보아주는 것처럼 이것은 빼라, 이렇게는 하지 마라 하려면 안 보아도 된다고. 영상을 한편 봐주는 대가로 도대체 얼마를 받는 줄 아느냐고. 맘이 많이 상했나 보다. 조용조용한 말속에 고통이 지나간 흔적이 느껴진다. 광고가 나올 때 끝까지 보면 십 원이고 건너뛰기를 누르면 1원이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 같다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일원 안 받아도 되니 내 하는 것이 꼴 보기 싫으면 영상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좋게 이야기하지만 나름 격앙된. 딱 부러지게 야무지게 할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자신의 성미와 좀 맞지 않는다고 아무 데나 갑 질을 하듯 쪼르르 댓글을 달아 속을 상하게 해야 하는지.


날마다 꽃을 보여주려면 어마 무시한 시간과 수고가 따른다는 것을 꽃순이들은 다 안다. 손바닥 화면이지만 아롱이다롱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헤살 짓고 나에게로 오는 것 같다. 꽃을 가꾸며 조목조목 터득한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어주니 늘 설렌다. 도움을 받아 풍로초가 한창 새침 덩어리다. 좋아하는 것들을 새롭게 알아가는 것은 알토란 같은 기쁨이고. 자금자금 한 야생화에 눈떠가는 즐거움은 배가 되어 마음에 담긴다.

이제껏은 한껏 멋을 부린 이쁜이들만 카메라에 담아 주었다. 며칠 전 비 오는 날은 특별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비 맞아 축 처지고 지는 꽃들을 일일이 보여준다. 봄 한철 쉬임 없이 피고 지며 시샘하듯 경주를 하는 것 같던. 꽃잎들이 스러진 빈 대궁만 남은 껑충한 꽃대의 가늘음이 숙연한 느낌마저 준다. 할 일을 다 마치고 고개숙인 것들은 참 달라 보인다. 숙제를 마친 노년의 생을 보는 것 같다. 꽃을 달고 있지 않으니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들이 여럿이다. 초록이 들을 잎으로 보다는 꽃으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부심만 기억해주는 찰나의 환호성. 휴식기에 들어가 그늘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들이 애처롭다.

나는 장마이건 여름이건 꽃님이 들을 마당에 햇빛과 비바람에 고스란히 내어놓아, 거친 세상을 마주하게 하는 모진 마음이 있다. 견디고 살아남은 것들과만 친하겠다는 엄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와 달리 그이는 일일이 화초들의 요구에 아기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 같이 애틋하다. 꽃 어미가 되고도 남을만하다는 내 나름의 자로 잰다. ‘그대는 꽃 엄마로서 끔찍이도 아이들을 사랑하니 거기에 합당한 상으로 꽃들의 웃음을 상으로 내립니다.’


꽃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 얼굴처럼 하모니도 다 다를지. 벌거숭이 임금처럼 우리는 꽃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분명 그 세미한 음악소리를 듣는 분이 있을 것 같다.


꽃을 달고 있는 것들은 봄·가을처럼 뭉근한 햇빛을 좋아하지만 한여름의 땡볕은 질색한다. 사람이나 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한 수 배운 대로 쏟아지는 거센 빛을 피해 주느라 파라솔을 세운다. 따가운 볕이 드는 한낮일 때는 그늘을, 설핏한 서향의 누그러진 빛살을 머금어 고운 자태를 뽐내보라고. 벌써 때깔이 다르다.


자기 전부터 내일 꽃 볼 생각에 빨리 자고 싶기까지 하다. 새벽에 일어나 발맘발맘 거닐며 꽃들과 눈 마주치는 시간이 부듯하다. 어디서 그런 빛나는 빛깔들을 쏟아내는지 황홀하기 그지없다. 그저 바라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이 예사말이 아니다. 예전에는 꽃이 벙그러지면 누구에게 자랑하지 못해서 안달을 했다. 그것마저 나눔이라는 거창한 마음을 앞세우며. 이제는 얼치기 감정이 수그러졌는지 그마저 시들하다.


키운 꽃들이 나만을 위한 것이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만을 위한 노래, 나만을 위한 꽃, 나만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긴 시절을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왔다면 이젠 나를 위한 여정이어도 될 것만 같은.


단돈 1원을 내고 그 고운 꽃들을 아낌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횡재다. 고마움이 물처럼 차오른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처럼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들로 주위는 넘쳐난다. 목소리와 야생화 꽃으로만 기억되는 그이에게 순전한 박수를 보낸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또 알아낸다. 비 온 뒤의 맑음 같은 영상을 언제까지고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