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내려온 딸과 산책이 하고 싶어 금계국을 판다. 황금빛 꽃들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것이 얼마나 싱숭생숭 한지 모른다고.
신발이 무겁다고 슬리퍼를 끌고 나서는 것을 안 간다고 할까 봐 차마 말리지 못한다. 다리 밑까지 가자 사진을 찍어달란다. 아이들 어릴 때 여기 얕은 물살이 흐르는 곳으로 행단하듯 살금 걸음으로 모래톱까지 가서 놀았다. 강물이 밀어다 놓은 모래땅이 섬처럼 솟아 있었다.
모래언덕을 지나 바다가 나오는 『은지와 푹신이』 그림책을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아했다. 한없이 펼쳐진 모래밭은 그림이지만 온통 마음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안에 모래벌판을 자꾸 들이며 드넓은 모래밭을 꿈꾸었다. 아이들이 제 걸음으로 다니게 되자 작은 모래톱이지만 자주 찾았다. 그런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딸에게는 어린 날의 추억이 되었을지도.
꽃길은 언제 나오느냐고 묻는다.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습지공원의 징검다리를 몇 개씩 지나고 나야 꽃밭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딸의 얼굴에 갈까 말까 망설임이 비친다. 그럼 돌아가자고 내 마음을 비운다. 엄마가 안 되었는지 계속 가보자고 한다. 혼자서 거의 매일을 다니던 길을 딸과 함께여서 발걸음이 겅중겅중 위로 솟구친다.
습지로 들어서자 노랑어리연꽃이 수줍다. 길 곁으로 우쭉우쭉 자란 풀들이 우리를 숨겨버린다. 수도 없이 피던 보라색 지칭개도 이제 지쳤나 보다. 창포도 벌써 씨방을 만들어 씨를 꽁꽁 싸매어 놨다. 강가의 시간은 꽃들과 함께 물들어 가는 것 같다.
얼추 반시간을 더 가자 드디어 부신 뜻 노란 꽃들이 하늘거린다. 딸 하는 말 애걔 이것이 온통 황금빛 꽃밭이야. 실망감을 내 비춘다. 난 어릴 때의 유채 밭만큼 인 줄 알았네. 딸의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강물을 따라 노랗게 꽃띠가 그려졌었다. 딸은 노란 꽃을 보면 자연스레 그 시절의 꽃길과 이어지나 보다. 금계국은 유채꽃과 비교가 되어 한참을 밀려난다.
강 가까이 있던 집이어서 새벽마다 오리 떼들이 유채 잎을 뜯어먹느라고 소란스러웠다. 한겨울 오리 떼들이 먹고 또 먹었어도 봄이 되면 유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연약한 순을 키워내고 그 많던 꽃송이들을 밀어냈다. 수도 없이 날던 꿀벌들의 붕붕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시간들이 문득 깨어난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이 펼쳐지던 유채꽃밭을 왜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나.
노오란 꽃길을 걷는다. 너울거리는 송이송이의 황금색 꽃들이 맘속에 들어찬다. 그때의 긴 유채꽃길보다는 이 길이 내게는 더 행복이고 기쁨이다. 지난한 시간들과 겹쳐있는 꽃밭까지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일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나날이다.
꽃이 멈춰 선 곳까지 계속 걷고 싶어 하는 나와 달리 딸은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아빠를 부른다.
다음 날 다 저녁에 딸이 고등학교 담임을 만난다고 나간다. 학교를 졸업하고 오륙 년은 넘은 것 같다. 선생님이 책을 냈다고 연락이 와서 집에 내려갈 때 받겠다고 했다며. 이슥해서 들어온 딸이 두 시간 반을 걸었단다. 중간에 발뒤꿈치가 벗겨져 약국에 들러 밴드를 붙이고 또 걸었다는. 은퇴하신 여선생님은 걷는 것을 좋아하셔서 그만 걷자 말은 못 하고. 하물며 다음에 만날 때는 아예 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