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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함을 열어줘

by 민진

수국 계절이 왔다. 한창 피어나는 꽃들이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한다. 지인의 집에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선다. 환하게 다가와야 할 것들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일부러 수국이 피었냐고 묻지 않고 찾아온 길. 눈 닿는 곳마다 꽃으로 만발했을 거라고 여겼다. 무슨 말인가를 듣고서 가면 지레짐작함으로 기대가 사라지거나 높아지기도 해서 순수함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수국 꺾꽂이를 많이 해서 내년에는 수국 정원이 될 것이라고, 수국을 보러 오라던 그이의 말을 기억하며 기대로 가득 찼다. 겨우내 수국 나무들이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풍선 정원이 된 것 같다고 했었다. 낮에는 모르겠는데 밤에는 하얀 것들이 우뚝우뚝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네다. 그이의 남편은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고 한다. 혹여 추위에 꽃눈이 얼까 봐 뒤집어 씌어준 봉달이들이 아무 효과를 못 내고 동장군에 기습을 당하였다.


꽃이 드문드문 가뭄에 콩 나듯 듬성듬성 보여준다. 꽃이 귀해서 더 돋보인다. 수줍은 듯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처럼 어여쁘다. 아쉬움만 면하라고 하는 듯 아쉬움만 가득하다. 수많은 깻잎 같은 잎들이 수북하게 자란 나무들로 뜰이 가득하다.

새로 나온 수국 품종들은 새눈에서나 묵은 눈에서나 꽃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묵은 가지에서만 꽃을 내어준다. 새로운 품종들은 아직 몸값이 거하니 조금 더 신분을 낮추었을 때 들여야 한다. 거기다 지금 있는 것들을 내칠 수도 없다. 잘 다독이고 방법을 찾아내어 내년에는 수도 없는 꽃들의 축포를 터트려야만 한다.

찬바람이 불어 펄럭거리는 비닐 소리들이 휘파람처럼 들릴 때에 하늘의 별들도 신기해서 눈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니 공기가 차고 맑아서 가끔 별들이 내려와 '이것이 무엇이지!' 하고 보고 갔을 것 같다. 뒤뜰의 대나무 숲에서 숴이숴이 댓잎들이 바람에 서걱 일 때 가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국들이 오들오들 떨며 어서 봄이 오라고 마음을 다해 빌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도 지난여름 수국이 환해서 나눔도 하고 몇 달을 분홍 꽃등이 켜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명맥만 유지했다. 그마저 피어나지 않았다면 내 마음에 멍이 들었을 것 같다. 예쁘게 볼 것이라고 들인 장미 수국은 겨우 촉하나 살아남아서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고 있다. 뭐든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심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사각 큰 사기 화분에 거름을 잘 섞어 분갈이를 해줬다. 자라거나 아예 명줄을 놓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대로 얼음하고 있는 모습에 속이 탄다. 너 그럼 방 뺀다, 협박을 해 보지만 들리지 않는지 그대로다. 장미 수국에 대한 미련이 남아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 저것을 작은 분에 옮기고 다른 것을 주인으로 들여야겠는데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이 따뜻한 남쪽나라에 오랜만에 강물이 얼었었다. 한 두어 번 온도가 곤두박질을 쳤다. 눈 소식이 귀한 이곳에 영천 강이 얼자 코로나 정국인데도 얼음판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썰매를 타거나 미끄럼을 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물론 그다음 날 얼음이 녹으면 위험할까 봐 시에서 바로 막아섰다고 한다.

몇 년 만에 한번 눈이 내리면 아이들과 강둑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꽃으로 변한 풀들의 모습을 신기한 듯 지켜보았다. 마른 꽃 대궁들은 다시 하얀 꽃들로 피어났다. 건너 산에 눈꽃이 핀 숲의 모습이 정겨웠다. 강둑에 얼마 쌓이지 않는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드느라 애를 쓰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해가 나면 바로 스러져가던 눈들.

그 야리야리한 꽃눈들이 어는점에서 파르르 떨렸을 것이다. 꽃눈이 얼면 꽃은 피지 않는다. 수국만이 아닌 영춘화, 라벤더 월동을 잘하던 녀석들이 여럿 강을 건너갔다. 몇 년씩 아무렇지도 않아 어련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뒤통수를 다. 수국이 생기로움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내년을 기약해야 하나 보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린 보람도 없이 마음을 접어야 한다. 사노라면 이런일이 자주다. 그때마다 마음을 다독이고 다잡는다.

수국 꽃 두 송이가 반짝 아쉬움을 달래준다. 두 송이가 열 송이를 스무 송이를 대신한다. 포엽으로 둘러쌓인 보석함을 열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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