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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만 피는 꽃

by 민진

꽃씨를 받아오는 버릇이 있다. 분명 어디선가 까맣고 수류탄처럼 생긴 분꽃 씨를 가지고 왔나 본데 기억에 없다. 다른 꽃씨에 섞여 딸려 들어갔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


더부살이로 꽃나무 구석지에 분꽃 한 개 나 있다. 반갑기도 하여 비 오는 날 따로나기를 해 주었다. 흙이 자기 맘에 들지 않아서인지 한해살이 치고 다소곳하다. 화단의 분꽃들이 우쭉우쭉 자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집 분꽃은 활개를 치지 않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이른 아침에 살피면 꽃이 피었다가 몽 그라저 있어서 이상하다고 여겼다. 분꽃은 늦은 오후에 봉우리를 열어 아침까지 피어있다고 알기 때문이다. 자꾸 꽃잎을 오므린, 진 꽃 뒤태만을 보게 된다. 그때마다 깜깜한 밤에 한번 나와 봐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많이 나대지 않고 외목대로 자랐다.


꽃 튜브 영상을 보다가 반짝 분꽃 생각이 나서 밤 아홉 시쯤에 나가 본다. 연분홍의 꽃잎에 잔잔한 진분홍의 선이 깨알 같이 박혀있다. 한 나무에 두 가지 색깔을 피워낸다. 저 스스로 변이가 됐는지. 분꽃 체취를 맡아본다. 누나에게서 맡아지는 향기라는 말이 생각난다.


혼자 보기 아까워서 방에 있는 막내를 부른다. “아들아 나와 봐. 분꽃이 아침에는 볼 수가 없었는데 지금 나가보니 이렇게 훌륭하게 피어 있네.” “밤에만 피는 꽃인가요?” “잘 몰라, 밤에만 피는 꽃도 있나” “향기가 참 진하네요.” 현관 입구에 가져다 놓는다. 공간이 향기로 채워진다.


꽃은 사방이 고요할 때나, 한 낮에나, 저녁에 피어난다. 각양각색의 타고난 모습대로 정해진 때가 되면 방싯거린다. 언제만 피어나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면 참 억지스러울 것 같다. 달란트대로 삶을 살아내기 때문이다. 조금 일찍 피기도 하고 느지막이 꼴찌로 꽃잎을 살그니 열기도 한다. 꼭 내 얘기 같은.

키다리 빨간 화분이 놀고 있어 나팔꽃 씨를 심었다. 텃밭농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받아온 이별의 선물 같은 꽃씨다. 잘 자라는가 싶더니 넝쿨이 뻗어 나기 시작하는데 감당이 안 된다. 마른 대나무를 박아서 순을 위로 올리다가 아래로 내리다가 용을 써 보지만 자라는 속도가 빨라서 무슨 수가 필요했다.

땡볕을 싫어하는 녀석들에게 오후의 옅은 햇볕만 먹으라고 펴 놓은 파라솔과 줄로 이어 건너가게 한다. 파라솔 지붕에 나팔이 순들을 스카치테이프로 살짝 고정시켰다. 어릴 때 지붕에 올라가는 박 넝쿨이나 호박 넌출 같은 느낌이 난다. 눈 뜨자마자 나가보면 언제 피어났는지 기상나팔 같은 꽃잎을 열고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열 송이 이상씩 나팔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신비롭다. 아침나절이 지나 햇살에 힘이 들어가면 곧 숨을 멎는다.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파란색 꽃들의 생명이 늘어난다. 긴 숨을 들이켜는 것이다.


봉숭아 씨를 작은 분에 여러 개를 심었다. 마당이 작아서 그리움만 목 축이려고 내 딴엔 고심한 흔적이다. 집은 좁고 꽃 인구밀도는 높아 자주 목말라하고 힘들어한다. 아픈 손가락처럼 눈에 밟혀서 물을 말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잠시 피었다 지는 꽃들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은 무엇에 대한 연민일까. 꽃들의 시계로는 긴지 짧은지. 다만 내 기준으로 잠깐 피었다 가는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 분꽃을 아쉬워 하지만 지는 것을 애달아하지는 않는다. 누구는 꽃의 인생이 너무 짧다고 탄식하기도 하지만, 나는 꽃을 본 즐거움으로 하루가 지난다. 새 날에는 새 꽃이 피기에.

어릴 때부터 보아온 꽃들이어서 애착이 더 가는 걸까. 그 꽃들에 덧 입혀진 그리움으로 오늘도 나팔꽃과 봉숭아를 그윽이 바라본다. 빛깔과 향기에 대한 회귀본능이 너무 일찍 시작된 것은 아닌지.


울 밑에 자라던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 나에게 손짓을 한다. 초가지붕에 올려 키웠던 하얀 박꽃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달빛 속에서 더 희기만 하던 꽃들. 텃밭에 넝쿨로 뻗은 호박꽃에서 나는, 벌들의 날개 짓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꽃들은 알까, 내가 온 마음으로 즈 이들을 기뻐하는 것을. 발맘발맘 돌아보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을까.


볕 쪼이기 좋은 가을 햇살과 산들산들한 바람사이로 향기를 날리면 좋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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