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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by 민진

들꽃이 피는 계절이다. 쑥부쟁이도 망울 거리고 국화들도 나 몰래 스리슬쩍 몽글거린다. 누님 같은 꽃을 보려면 눈 딱 감고 잊어버리고 있어야 한다. 시월 마지막 날에나 피어나려나.


다행히 서운하지 않게 하얀 꽃이 피어난다. 키가 작지 않다. 담벼락에 기대어놓으니 담을 넘어다본다. 노란 코스모스와 버들 마편초 옆에 세우니 제법이다. 한 가을 한다. 향기까지 하늘거린다.


꽃들 사이에 살아가다 보니 새로운 꽃이 피어나도 그렇게 달뜨지는 않는다. 그런데 구절초가 피어나니 배실배실 웃음이 삐져나온다. 무슨 마음인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봄 한날 그곳에 갔다. 구절초순들이 지천으로 자라 있는 밭에서 조금 캐기도 하고 뜯어와 심었더니 뿌리를 잘 내렸다. 앙증맞게 자라라고 순지르기를 했는데도 멀대 같다. 다시 생장점을 자르면 꽃눈이 느지막이 생길까 봐 그대로 두었다.


구월이 되니 구절초의 시간이 되었나. 꽃을 맺히기 시작하여 달 끝자락에 하얗고 소담스럽게 피어난다. 가녀리고 자태가 곱다. 꽃송이 째 바람에 흔들거리면 내 마음도 따라서 한들거린다. 산속 깊은 곳에서나 만나던 꽃이 내 울타리에서 하늘거리니 소중한 것을 가져다 놓은 것 마냥 좋기만 하다. 날마다 사진을 찍어 본다. 혼자 보기 아까워 가족 단체 톡 방에 올린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꽃잎이 비에 젖으면 제라늄이나 임파첸스 같은 보들 거리는 꽃잎들은 물을 머금어 상해 버린다. 구절초 꽃잎에 빗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가느다란 꽃잎들이 서로 엉겨 붙는다. 일일이 떼어 준다는 것은 되지 않을 일. 바라만 보았다.


아침에 비가 그쳤다. 해가 다른 날보다 더 쨍그랑하다. 밖에 나가 있던 나는 은근이 걱정이 되었다. 꽃잎들이 뜨거운 빛살에 어떻게 되었을지. 돌아오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꽃송이들이 보송보송하게 바람 따라 뒤챈다. 들국화라 그런가. 비 맞은 흔적이 없다.


다시 사진을 찍어 올렸더니, 큰 딸이 집에 있는 막내에게 난간에 페인트로 하늘을 그리면 어떨까 하고 물어본다. 막내, 바로 쏘리라고 거절한다. 딸이 ‘이렇게 칼 답을 하다니’ 답을 보내왔다. 막내에게는 큰 누이다. 기질도 둘이 엇비슷하여 잘 통한다. 그런데도 재고가 없다.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다. 마음이 없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잘 그러지 못하는 나는 딴엔 부럽다.


내 아이들보다 더 어린 학생들과 한 강의실에서 마주한다. 그냥 강의만 들으면 편할 텐데. 조별과제를 하라고 하면 마음에 돌덩이 하나 얹힌다. 학생들은 맞는 것에는 맞다 하고 아닌 것에는 아니라고 자기 의사가 분명하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되어서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다. 지금은 오히려 편하고 나도 조금씩 물들어 가는 것 같다. 그들처럼 아니라고 곧바로 말 못 하지만 내 의사를 표현하고도 마음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속 끓이지 않고 내 의사를 분명히 하는 것도 나아진 것 같다. 오늘도 막내에게서 한 수 배운다. 싫으면 싫다고 할 수 있다는 것에 한 표.

나도 막내아들 생각과 같다. 담벼락에 하늘을 그린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유행처럼 벽에 벽화들이 그려지는 것 같다. 학교에서 벽화를 그리러 갈 사람을 모집한다. 비교과 봉사점수 일점이라고. 하루 종일 벽과 겨루기를 하겠네. 어떤 것들은 비워두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는데.

가끔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마음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자꾸 생각할 거리들을 빼앗아 가는 것 같아서. 온 동네 골목의 벽마다 이야기를 담아놓으면. 사연들이 폴폴 살아나서 수런수런 말을 걸어올 것 같다. 우리들 마음에 너무 많은 것들이 담기게 될까 봐 걱정이다. 빈 마음도 조금은 남겨놓아야지.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 넣으라고만 강요하는 것 같은 요즘이다.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디는 것과 같이.


선과 여백의 미가 동양의 미라고 하는데 그것마저 가려버리려고 하나. 내가 구절초를 왜 마냥 좋아하는지 비밀이 풀렸다. 그 청초한 꽃에 선과 여백의 멋스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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