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튜브를 본다. 화려한 색과 가지가지 모양의 클레마티스들이 서글서글하게 피어있다. 우리말로는 큰꽃으아리. 봄 산에 가면 볼 수도 있다. 꽃이 얼마나 시원시원한지 거침이 없다. 몸값도 제법이다. 언젠가는 키워보리라고 맘먹고 있었는데.
꽃씨 나눔을 한다고 한다. 참가 의사를 밝히라고 해서 당연히 ‘꽃이 너무 예쁘네요. 추첨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더니 번호표를 받게 되었다. 칠십구 번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다섯 종류의 클레마티스 씨앗을 사십 명에게 보내준다고 하니 내 번호가 되기를 은근이 바랐다.
오늘 아침에 추첨을 했다. 한 삼백 여명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영상을 보니 다들 잘도 뽑히는데 내 번호는 끝까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저번에 다른 유튜브에 응모했다가 떨어지자 운영자 탓 인양 삐쳐서, 한동안 그 영상을 멀리 했다. 이젠 그럴 마음이 아니다. 예방주사 효과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대체 공휴일이라서 오후에는 코스모스를 보러 갔다가 ‘카페 앤’이라는 찻집에 들렀다. 아마도 『빨강머리 앤』의 앤인 듯하다. 장식, 소품, 그림이 하나같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풍스럽다.
창밖이 내다보이는 곳에 앉았다. 길과 길이 이어져 차들이 가끔 꼬리를 물고 사라져 가는 모습들이 훤히 내다보인다. 호수 주변이다. 길 끝에는 어디가 나올지, 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슨 풍경이 펼쳐질지가 궁금해진다.
빨강머리 앤 시리즈를 한여름 동안 읽은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에이번리의 앤만 알고 말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앤이 결혼을 하여 아이들을 낳는다. 육아의 어려움과 그 아이들이 자라서 군대에 가게 되고 전쟁에서 아들이 전사하는 아픔도 겪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봄이 오면 꽃을 돌보며 꽃씨를 심곤 하던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겨울을 뚫고 돋아나는 붓끝같이 뾰족하게 내미는 싹들. 무너지고 싶지만 자신을 다스리던 모습. 질기고 건강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앤. 화단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일은 어쩌면 자신에게서 노여 나는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인생은 좋을 때와 궂은 때가 맞물려 가는 것이라고. 그 푸릇푸릇했던 앤도 아픔이 비켜가지 않는 것을 보면. 오목조목한 카페의 제목을 왜 앤으로 정했는지. 누군가 카카오 톡에 앤이 대답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오면 마음이 편치 않다. 앤의 인생을 소녀에다 묶어놓고 그것이 다인 것처럼 하는 것 같아서.
바라다 보이는 길 너머 우리 앞에는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른다. 생이 다하기까지 끊임없이 가야만 되는 길. 비밀에 싸인 길을 너도 가고 나도 간다. 누구라도 꽃길로만 갈 수 있다면.
카페 안에서 바라보니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보인다. 오전에 옥상에 빨래를 널고 왔더니 열어 두었던 현관 신발장 위의 꽃병들이 와장창 깨져 있었다. 유난히 바람이 거세었다. 아이들 어렸을 때의 모습을 조각모음으로 붙여놓은 액자와, 우리 부부의 캐리커처만 살려놓았다. 사금파리가 된 것들은 사그리 빗자루로 쓸어서 버릴 수밖에. 앙증맞은 컵이나 신기하게 생긴 것들이 눈에 띄면 하나씩 사 모으는데 세 개나 깨졌다. 물건들도 내게 왔다가 가는 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미련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가만가만 생각을 더듬는다. 바라다 보이는 수수한 정원의 운치와 가로수를 사이에 두고 난 길을 보며 작아지는 나. 어린 가을이 더듬거리고 있다. 첫봄에 꽃을 내밀었던 벚나무가 노랗게 한잎 두잎 물들고. 제 계절을 지새운 꽃들이 초라해 보인다. 가는 계절에 속해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속절없다. 끝까지 초라해지지 않으면 안 되나.
작은 정원을 거닌다. 여름 꽃과 가을꽃이 공존한다. 한편에 허옇게 수염 같은 것들이 폴폴 거리고 있다. 가까이 보니 클레마티스 씨앗들이 몽실몽실 하다. 그렇게나 많은 씨앗을 품고 있다니. 필요한 만큼 씨앗을 받는다. 우편보다 빨리 꽃씨가 내게로 왔다.
저온처리를 하여 심어도 몇 개월이 걸린다고. 한겨울을 밖에서 나야만 싹을 틔울 수 있는 꽃이다. 찬바람과 냉골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당찬 아이 으아리. 겨울도 지나고 봄도 지나 여름에나 얼굴을 내밀만큼 시간여행을 길게 하는 꽃. 내년에 우리 집에도 으아리가 피어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