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어처럼.
마음에 어떤 꽃을 들일 때 삶의 질이나 가치가 달라질까. 살아가는 데 있어 우선순위가 무엇이냐에 따라 생의 방향이 조준되는 것은 아닌지.
어느 날 본 꽃이 웨딩 찔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웨딩이 주는 말맛이 떠오른다. 은은하면서도 설렘 가득하다.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 노래가 생각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 언제 들어도 가슴 한쪽이 아린.
번안한 노랫말이 원 가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정서적 차이가 노랫말 하나에서도 달라진다. 인생은 그런 것이니 그걸 감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너무 현실적인. 재미가 없다. 새장 속에 갇힌 듯 갑갑하다. 아마도 우리의 ‘웨딩케익’을 모르고 원곡 가사를 알았다면 괜찮다고 받아들였을지도. 먼저 아는 것과 나중에 알아버린 느낌은 사뭇 다르다.
그 꽃을 보았을 때 새색시 같은 느낌이 났다. 야리야리한 분홍의 날개가 단아하고 곱상했다. 이름을 몰랐을 때는 이쁘다는 생각만 했다. 꽃 이름을 알았을 때 마음이 환해졌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 오고 싶었지만 한 여름이라 잘못될까 봐 참았다. 집에 와서도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몇 날 후 찔레를 데려왔을 때 비가 내려주었다.
꽃잎을 물어준다. 내년을 기약해서 가져왔기에 몇 개의 꽃송이에도 고마운 마음이다. 월동이 된다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좋아한다. 서늘한 기가 바람에 실리는 날에 몇 그루 더 들여왔다. 꺾꽂이를 한 것들이어서 가녀리다. 당근에 예쁜 화분이 나왔기에 멀리까지 가서 사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에 아는 집사님으로부터 중매가 들어왔다. 철이 없던 시절이라 그 댁으로 갔었다. 울안 너른 뜰에 개울처럼 물이 흐르고 과실 수가 많은 것이 풍족함을 내비춘다. 선을 보던 그는 키도 크고 빠짐이 없는 것 같았다. 서로 괜찮다는 느낌이 오갔다.
서울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만나고 헤어질 때 뒷모습을 보았다. 걷는 모습이 달라 보였다. 이야기는 잘 되어 가는데 고민이 되었다. 그 집사님에게 속마음을 얘기했더니 펄쩍 뛰었다. 군대 잘 다녀왔고 잘못 보았다고.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걸음걸이가 다들 다르니. 혹여 시어머니 될 분에게 그 말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나를 단속했던 그분이 가서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 어머니 되는 분이 노발대발 당장 없던 일로 하자고 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 뒤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선을 보는 날 식사 기도를 거창하게 해 주던 목사님 딸하고 결혼을 했다고. 목사님 마음에 은근히 두고 있었나! 내가 도화선으로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 얼마 있다 합쳤다는 말이 들려오고. 각다분한 느낌이 들었다. 시어머니 되는 분이 아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두어야 하는 것을 중간에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드린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에 아연했다.
그 참에 양부모님이 있는 곳에 시집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어머니도 홀어머니였다는 것은 까먹는다. 한 사람이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홀어머니와 산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내 나이 때는 이혼한 가정이 잘 없던 시대였기에. 사람마다 다른 것을.
선입견에 묶이게 되면 그것에 따라 행동의 방향이 갈피를 잡아 감정이 눌러진다. 판단이 흐려지기도 하고. 한 가지 만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단편이다.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 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 자연스럽게 그때 일이 떠오른다. 만약에 그와 결혼을 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가늠해보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보지 않는 길에 대한 기대와 아쉬움 때문인지도.
웨딩 찔레 장미가 계속하여 꽃망울을 머금어 뽀샤시하게 꽃을 내어준다. 내 젊은 날의 기억의 한 페이지를 길어 올리는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