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이 없는 것 같으나 마지막 순간 다른 꽃들이 돋보이도록, 가녀리면서 분위기를 돋워내는. 수수함이란 보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필요한 부분은 아닌지.
어제는 기억하고 오늘은 까먹는. 우리 과 학생이 수강 신청했냐고 하지 않았다면 언제쯤 생각이 났을까. 여덟 시 반에 시작되었는데 아홉 시도 훨씬 지나 접속했으니 공부하려고 했던 과목들은 매진이었다. 전공 중에서도 사람 수가 넉넉한 두 과목에 이름을 올리고 교양 하나와 사 학년 과목에서 세 과목을 신청했다. 그중에 신나서 신청했던 화훼장식학. 새로 개설되었나.
만만찮은 이론에 당황한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다행히 추워지기 전에, 꽃값이 더 비싸지기 전에 실습을 한다. 놀러 가는 것 같이 기다려지는 이인일 조로 기본 꽃꽂이 과정을 배운다.
세 번째 시간이다. 카네이션으로 회의석상에 놓는 사방 화를 두른다. 두 가지 색의 카네이션을 유스 커스를 기준으로 꽃의 작은 얼굴은 멀리 가져가고 활짝 핀 꽃들은 가운데 모아 심는다. 반원을 그려내라고 한다. 형태를 다 잡았다. 뽀얀 얼굴들만 맨숭맨숭하다. 잘난 이들만 모여 있는 곳 같이 숨이 막히다. 비어있는 부분들이 허점으로 묘한 대비를 이룬다.
소국과 쏠리스타를 허허로운 곳에 적절히 채우라고. 섬세한 꽃들이 작은 별로 떠 오른다. 조심조심 비어있는 공간을 메워간다. 조용조용 부드러움이 감돈다.
산으로 들로 다니던 때가 있었다. 봄과 여름 가을은 교회 화단에 피어난 꽃으로 강대상 꽃꽂이를 했다. 겨울에는 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아다녔다. 빨갛게 반짝이는 맹감나무 열매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병아리 콩 같이, 가슴을 열어 보이면 주홍의 선연함. 누구를 유혹하려는 몸짓이던가. 구부러짐이 한몫을 했다.
천연의 멋이 살아있는 강요되지 않았던 저만의 멋스러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라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자기만의 곡선을 키워낸 것은 아닐까. 그렇게 만들래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은 선의 아웅다웅. 가지 하나 꺾어 어디에 꽂을지라도 그윽한 곡선을 그려내는 완전체 같다. 제 계절을 산에서 살아낸 노박덩굴의 열매가지. 겨울 산을 더듬던 십 대 후반의 시절이 엊그제 같다.
저 들에 피어있는 들꽃 같이 계절을 익혀낸 열매가 제 빛깔을 드러내었다. 구석에 홀로 서 있어도 외롭지 않은 나무. 계절을 따고 움킨 것은 누군가 시켜서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그 즐거움은 순전히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 교회 뜰에 피어난 하얀 꽃으로 장식했던 꽃꽂이를 보고 반주자 언니가 칭찬해 주던.
살아오면서 절화 꽃을 만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이들 졸업식 때나 꽃집에 들러 꽃다발 산 것이 전부 인. 내 뜰에 핀 꽃들로 만족하는 시간들이다. 노란 코스모스나, 구절초 꽃송이 두어 개 따서 작은 유리그릇에 띄운다. 식탁 한편이 환하다.
꽃의 여왕이라고 하는 장미도, 감사를 품 안에 간직한 카네이션도 지들끼리만 있으면 뭔지 모르게 헤린 느낌이다. 마무리로 소국과 쏠리스타나 유칼립투스를 만나면 꽃들이 자연스레 살아난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돋보이게 해주는 것들로 인하여 활짝 피어난다.
장미와 카네이션이 채움으로 빛을 내는 꽃이라면 노박덩굴은 잎을 떨군 비움과 선, 여백의 노래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