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늘에 호수가 잠겨있는지 호수에 산그늘이 잠겨있는지. 십일월의 어느 아침 호수 근처를 달린다.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물도 작은 단위로 나누이면 눈앞을 가릴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큰딸이 제주에 두 주간 일하러 갔다. 제주시에서 숙박을 제공하고 일하는 공간과 모니터를 제공해주는 가 보다. 어제는 올레길 칠 코스를 돌았다며 사진을 보내온다. 지도를 보니 김만복 김밥집이 보인다. 나 그곳에서 친구들과 김밥 사 먹었다 했더니 맛있냐고 물어본다. 괜찮은데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된다고 하자 다시 그곳에 가게 되면 사 먹어 봐야겠단다.
저녁노을이 멋진 바다가 전화기 화면에 떠오른다. 딸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맘이 놓인다. 다른 젊은이들처럼 여행도 다니면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기 바라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아서 안타까웠었다.
딸이 독일의 어떤 학교로 겨울방학 한 달 간 적이 있다. 일정을 마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보고 버스로 체코 프라하로 넘어온 것 같다. 거기서 아는 언니를 만나 저녁을 먹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다리에 기브스를 한 사람이 같이 따라 들어왔다고. 여럿이 자는 숙소였기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침대에 소지품을 두고서 씻으러 들어갔다고 한다. 나와 봤더니 겉옷이 안보였다. 지갑과 휴대폰이 들어 있었는데.
어두워진 거리에 진눈깨비는 흩날리고 외투도 없이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고. 옷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밟아야 하는 순서였으니 그런 것은 아닐지. 어둠이 내리는 밤이었지만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막막함에 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날이 밝자 여권을 만들고 비상금으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보험금을 신청하여 휴대폰이라도 하나 마련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은 것 같다. 몇 천 원의 여행자 의무보험이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절차들이 얼마나 복잡하던가. 그래도 그런 것을 해보는 습관을 가지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마 아예 그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때의 사진을 본 것이 없다.
다른 여행지를 뒤로하고 프라하를 택한 것은 그 도시의 문화를 둘러보고 싶어서였을 텐데 하루 저녁에 무산이 되어 씁쓸한 뒷맛이 묻어나는.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던 딸의 마음을 짐작해 볼 뿐이었다.
그 뒤로 딸은 여행을 가지 않았다. 동생 둘과 베트남 하노이를 다녀온 것을 빼면 일만 하고 지냈다. 그런 딸이 제주도로 간 것이다. 일도 하면서 제주를 걷고 바다를 숨 쉬며 사진을 보내오고 있으니 감개무량하다. 자전거로 다니느냐고 묻자 버스와 걸어서 다닌다고. 두 주간을 머무르면서 마음에 쌓였던 안개가 걷히기를 바라볼 뿐이다.
지난 시간들은 잊어버리고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로 날아가서 그때 보고 싶었던 곳들을 차근히 돌아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사는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단단해지고 있다 로 읽힌다.
걸어 다니는 곳마다 파도소리가 들려서 너무나 좋다고 영상을 찍어 보내온다. 며칠이나 되었다고 오후 세네 시쯤 되면 은근히 사진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본다. 오늘은 저녁으로 해물라면을 먹으러 갔는데 영업을 네시까지 밖에 안해 숙소로 돌아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먹는 것도 계획에 두어야 진짜로 즐거울 듯한데. 가는 곳의 맛 집을 검색해서 알고 가야 할 것 같다고 알은 체를 해본다.
햇빛이 쏟아지자 언제 눈앞을 가렸느냐는 듯이 안개는 걷혔다. 호수가 보이고 가을 산이 자기 여기 있었다고 말을 건네 오는 듯하다. 산을 뭉뚱그려 보면 색색으로 수놓아진 커다란 수틀이지만 숲길을 들어서면 초록 잎들 사이사이 단풍들이 가을꽃으로 펴 있다. 돌돌돌 흐르는 개울물소리가 맑은 악기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부자기 걷는 길이 고요롭고 산새 소리 물소리가 한없이 정겹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