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싶은 꽃 2

by 민진

십일월 막바지 바람결이 차갑다. 살갗에 닿을 때마다 실금이 그어지는 듯하다. 잎 지고 꽃송이들만 그네를 탄다. 등불이 흔들리는 것도 같다.


그녀는 꽃망울일 때는 어둠이 내리자마자 내 몸을 감싸 보온을 해 주더니 스물 한 송이의 꽃을 피워냈더니 할 일 다 했다는 듯 보자기를 펼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나는 더 피어있고 싶다.


한여름에는 삼사일을 넘기지 못하고 꽃잎 져야 했다. 보드라운 꽃이 따가운 햇살을 견디지 못함이다. 십일월의 느지막이 피어낸 꽃들이 두 주나 하늘거린다. 갈무리해야 할 때이다.

마지막 햇빛을 풀어놓아 주시는 자비는 다사로웠다. 꽃송이 하나하나 애태우지 않고 피어날 수 있었다. 그이는 찬바람에 갈빛이 된 꽃을 똑똑 따더니 가지런하게 빈 화분 위에 올려놓는다. 아직 지지 않는 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꽃송이를 펼칠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바람에게 건넨다.


다음 해에는 하얀색과 분홍의 천사의 나팔을 들여야겠다고 한다. 백합처럼 아래를 향하여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순백의 아름다움이 보고 싶어서인가. 깨끗하게 청초함을 마음에 들이려고. 캉캉 춤을 추는 집시 같은 핑크색 천사의 나팔은 뭔지 모르게 대비가 되는 듯하다. 그녀의 마음에는 두 마음이 사는지도. 하양과 핑크의 가운데쯤 머무르고 싶은지 모를 일이다. 어떤 색이라도 자연의 색을 닮으면 되지 않을까.

이웃의 할머니가 꽃이 예쁘다며 한그루 심어달라고 부탁했다. 물 꽂이가 안 되어 드릴 수가 없었다. 아랫집에도 독말풀을 천사의 나팔이라고 얻어와 심는 것을 보았다. 내년에는 꽃 하나 내어드리고 싶어 부드러운 가지들을 자른다. 스티로폼에 흙을 채우고 연한 순들을 꽂는다. 나누는 기쁨이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톱을 가지고 온다. 흥부가 박을 타듯 설겅설겅 썬다. 지난해 눈물 같은 나무진이 흘러나왔는데 시기가 늦었는지 물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 팔다리를 아낌없이 내어준다. 나의 비명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하였다. 다만 소리를 죽였다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에 실려 보냈다. 어디선가 가늘면서도 애절한 소리가 바람에 섞였거든 나의 신음소리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무게를 줄인다고 플라스틱 화분에 옮겨 심는다. 밑둥치만 남은 내 몸. 다 내어주었다. 화분 째 빈방으로 들어간다. 어둠 속에 잠긴다. 창이 환해지면 낮이고 깜깜해지면 밤인. 나를 내 안으로 잠재운다. 말없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죽음만큼 고요한 시간. 나의 잘린 몸에는 수도 없는 생명이 숨 쉬고.

깜깜하다고 희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겨울잠을 자듯이 버티기를 하는 것이니까. 어둠의 시간은 밝은 날을 살아내기 위한 앞섬이다. 가끔 나를 보러 오는 그녀를 기다리고 포근하고 환한 계절을 기다린다.


다시 피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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