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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밥

by 민진

지난봄이나 여름에 보았던 정원들이 보고 싶어 진다. 찬 계절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황량하지만 땅속에서는 벌써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메시지를 읽고 싶어서인지도.


‘바오밥’이란 카페를 가보았다. 꾸준히 커피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배우고 볶는, 기계까지 마련한 뒤에 남편을 설득하였다는. 아파트를 팔고 주택을 사서 카페를 열었다고. 뜰에는 월동을 시킨다고 비닐 이불을 덮어 놓았다. 오월에는 완전 꽃 축제를 하고 있는 듯하였었다.


사랑초들이 야들야들한 이파리를 내고 흰색 꽃을 가녀리게 뽑고 있었다. 봄에 오면 사랑초를 나눔 하여 줄 것이라는 말에 친구는 좋아한다.


늦가을에 사랑초 구근을 사서 심었다. 처음에는 꽃을 제법 보여 주더니 날씨가 추워지자 입 싹 씻고 잎만 무성하다. 들인 돈이 얼마인데 하는 언짢은 생각. 현관 앞에 놓인 한련화도 잎만 무성하여 연 잎처럼 하늘거리기만 할 뿐 꽃을 피워낼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아들에게 “한련화 잎 따서 밥 비벼먹을까” 해도 별 반응이 없으니 그냥 두고 본다. 봄이 오면 꽃을 보여 주려나. 주택이라 추워서 꽃눈이 생기지 않는지. 잎의 매력이 꽃을 대신하고도 남기에 그대로 둔다.


꽃망울을 매단 지가 언제인지도 모를 화초들이 적정 온도에 이르지 못했는지 얼음 땡 하고 있다. 아쉽지만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람들 간에도 온기가 흐른다. 말에 입혀진 차가움과 따스함. 그 보이지 않는 기류로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는. 내게서는 어떤 온도의 말이 쏟아져 나오는지 되짚어 보게 된다.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겨울인데도 꽃들이 환하다. “꽃과 친한 분임이 인정합니다.” 청 퀼트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다.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이란 그림책과 닮아있다. 청 재질이 주는 느낌이 밤의 고요를 떠 올리게 하였는지.


달빛 아래 손주와 나무 아래 담요로 몸을 감싸고 웅크리고 잠을 자는 모습. 어슴푸레한 밤의 정적 속에 달빛에 흔들리는 잔물결. 밤에 움직이는 것들의 날갯짓. 아침에 일어나 호수에서 물을 길어다 모닥불을 피우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낡은 뗏목을 타고 길을 떠난다. 태양은 떠올라 모든 사물에 빛을 입힌다. 온통 눈부신 초록이 된다. 모든 것은 어느 순간 빛난다. 축축한 밤의 적막들이 지나가고 서서히 여명. 마지막 페이지에 어린 따스함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작가는 어렸을 때에 유태인으로서 유랑생활을 하였다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목을 축여 주는 몇 마디 말은 시가 된다. 서서히 물안개가 내리고 정갈한 새벽 새소리에 이어 빛살이 비추어 오는 희망으로의 초대다.


버려진 청바지로 작품을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먼저는 가방을 만들었다고. 그러다 생각이 길어지고 맘이 자라나 캔버스에 옮기게 되었다고. 만약에 지갑이나 가방만이 전부였다면.

청 퀼트 작가 이만선 님의 작품


도전하는 것은 늘 가치가 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살포시 불러들이는.


예술의 세계란 시대마다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머무르지 않으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경지나 이론적인 부분을 따질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분명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나무를 하나 키워도 예술을 입힐 수 있는 것이라고.


가장 애써야 될 것은 삶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살아가야 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