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금요일 촌에 갔다. 토종 보리수를 심고 지난해에 틈틈이 받아놓은 꽃씨를 뿌렸다. 잡초만 우쭉우쭉 자랄 것이 걱정되어 궁여지책으로 화초라도 무성하게 자라면 풀의 세력이 조금 주춤할까 싶어서다. 너무 가물어 심겨 있던 나무들이 몇 보이지 않는다. 이발을 해주니 훤하다. 손이 있다는 것이 무슨 마술 같다.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나무들인데, 자주 가보지 못하니.
토요일 친구 아파트 화단에 꽃을 심어주러 갔다. 매 발톱 종류와 구절초, 해국, 백리향을 챙겨서. 연장이 부실한 탓인지 자갈 땅이어서인지 잘 파지지가 않았다. 구석에 백리향을 심었다. 땅을 기듯이 번지며 화단 한 모서리를 조용히 채워 봄이면 잔잔한 어여쁨으로 가득하기를 바랐다. 중간에 올라가 커피 한잔 하고 무거운 수국 화분을 들고 내려와 심었다.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다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화단을 손보던 분이 풀인 줄 알고 백리향을 뽑아 버렸다는. 깨알 같은 꽃별 들이 촘촘히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피어나 꽃 구슬을 이루는. 향기가 백리까지 간다고 백리향이라는데 꽃보다는 잎에서 향내를 내는 듯하다.
꽃이라 좋아라 심기도 하고, 풀이라며 심어놓은 것까지 뽑아버리는 사람도. 왜 물어보려 하지 않을까. 존중이라는 것은 이럴 때 필요한데. 겨우내 키워 꽃 피어나는데. 심는 날 그는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은 들꽃도 예뻐 보이는 것인데. 존재감이 큰 아이들만 원했나. 생각의 한 끗 차이다. 처음부터 풀이 아니었던 식물이 있기는 있었던가.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면서까지 꽃을 심었었다. 마음이 밟힌 것 마냥 아리다. 친구는 미안해서 이야기했으니. 내년에 다시 심자고 할 뿐. 가느다랗게 물결 지는 아픔은 어디서 오는 감정 선인지.
일요일 오후에는 비닐하우스를 벗기고 화초들 자리를 잡아주고 이것저것 만졌다. 한낮의 빛살이 쪼이면 온도가 높이 올라간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아이들이 데쳐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함. 큰일은 남편이 거들어 주고 자잘한 일만 했는데도 힘이 든다. 느지막이 원예과 카카오 톡에 코로나 확진자는 비대면으로 시험을 봐야 한다고. 이제껏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 말이 떠나지 않고 맴을 돈다. 꽃 심어주러 간 친구 딸이 코로나인 것 같다고 해서인가. 구슬이 꿰어지듯 생각이 고리로 연결되어간다.
저녁 먹은 뒤에도 화분 자리를 옮기고 높낮이를 맞혔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목도 따끔거리는 듯. 내일 당장 강의 들으러 못 가는 것 아닐까 염려가 된다. 남편에게 코로나 검사하는 키트를 사 오라고 부탁하고 타이레놀 두 알을 털어 넣고 잔다. 일차 코로나 접종했을 때 두어 번 심장에 이상이 왔었는데. 심장이 옥죄는 느낌이다. 건강검진 결과 심장이 부었다기에 신경이 쓰여서인가. 시달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이 뜨이자마자 코로 나인 지부터 확인한다. 학교를 가도 될 것인지, 병원으로 달려가 확진 결과를 받아 공결처리를 해야 할 것인지 사뭇 떨린다. 나를 만난 사람들의 안부가 걱정이 되기도.
검사하는 몇 분 되지 않는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난 것 같다. 세로로 줄이 그어진다. 혹여 두 줄이 나타날까 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 줄이 선명해진다. 감사하는 마음이 풍선처럼 부푼다. 어제저녁 내 몸에 나타난 증상은 어떻게 설명하나. 입술이 점점 부풀어 도톰해지니 묘하다. 그나마 마스크를 쓰고 다닐 수 있으니.
아침 여덟 시에 나간다, 실험하느라 학교농장에서 키우는 국화에 물을 주고 아홉 시 수업에 빠듯하게 맞춰 가는 나날에 대한 못마땅함. 오가는 길에 벚꽃은 팝콘처럼 터지는데도 마음이 바빠서인지 모르는 새 꽃잎 져 버렸다. 내가 무슨 초등생이냐고 뾰로통했던 불만이 스러진다. 화요일 아침에도 물 주고 학교로 향하는데 교수님 건강이 안 좋아 휴강한다는 한 줄의 알림이 뜬다. 다음 주가 시험이니 마땅히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할 것인데도 좋아하며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