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른 적이 없는데 이번 지방선거는 투표하기가 싫었다. 마음이 나이 들어가는지 매사에 의욕이 없다. 십 대, 이십 대를 지나 오십 대가 되어도 밝고 명랑한 성격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늘 씩씩하게 버티며 살아온 것 같은데 뭔가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헛헛하다. 할 일이 없어 그런다면 이해가 되지만 어느 때 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투표소가 한가하다. 신분증을 보이고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확인받는다. 용지를 받아 투표 부수로 들어가려는데 다른 때와는 달리 입구를 바로 들어가게 하지 않고 돌려놓았다. 공간지각이 둔한 나는 잠시 허둥지둥 댄다. 그곳에 있던 또래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는다. 그것도 못 찾느냐는 무언의 말을 들은 것 같아서였는지. 옹졸한 마음이 촉각을 세운다. 길을 못 찾아 헤매는 느낌이 들었나. 용지에 표를 박는다.
투표소에 가면 죄지은 사람처럼 졸아든다. 신분증과 얼굴을 번갈아보며 본인이 맞는지 확인 작업을 할 때부터 쿵한다. 말없이 무거운 공기를 만들어내는 선거인단의 앉은자리는 어떻고. 매사에 기죽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나의 권리행사 자리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 뭔가 추궁을 받을 것 같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다. 언제 어느 순간에서부터 와진 심리 작용일까 톺아보게 된다. 한 해 두 해 쌓여서 그러는 것은 분명 아닐 텐데.
몇 해 전 뉴스에서 보았다. 지지자에게 표를 찍어 곧장 반듯하게 접다 보니 인주가 번져 누구를 찍었는지 몰라 무효처리를 했다는. 그 뒤로 투표할 때는 곧장 접지 않고 바람구멍을 만들어 끝과 끝을 살포시 잡아 번지지 않게 투표함에 집어넣곤 했다. 무효표가 되지 않게 애쓰는 방법이다. 이번에도 세장을 따로 접어들고 투표함 앞에 서 한 장 한 장 집어넣었다. 아주머니가 한소리 한다. 용지를 한꺼번에 접어서 넣지 그러느냐고. 잔소리로 느껴져서 속이 상한다. ‘이것도 내 맘대로 못하느냐’고 하자 못 들은 척 다음 순서로 가라고 한다. 다시 나머지 투표용지를 받아 투표를 하고 나온다.
남편이 그랬어도 그런 말을 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만만해 보이나. 외출복으로 잘 차리고 나왔어야 했나. 선관위에 항의를 해야 하는가. 행동에 옮기지도 못할 생각이 춤을 춘다. 내면이 약한 다른 표현인 것 같아 나 자신이 가여워진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사회적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돌려세워버리는 것은 아닌지. 서서히 진을 빼고 가라앉기를 바라는 지도.
눈감기를 잘하고 살아간다. 작은 것 하나를 바로잡으려 해도 얼마 큼의 에너지가 소비되어야만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이 들어가면서 비겁해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만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하얗게 세어가는.
김수영 시인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생각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딱 내 모습이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것에는 분기탱천하는 것 같고 넘어가면 안 되는 것에는 먼 산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