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진 Jun 25. 2022

낡은 시집

   시간의 흔적, 추억의 농도, 파손의 형태와 의미 수집. 책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이란 책에 숨어 있던,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이 맘에 담긴다.


 수선하고 싶은 책이 있기는 할까 더듬어 본다. 뭔가에 애착하지 않게 길들여졌고.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거리두기를 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의미 부여를 못하고 살아온 것만 같은 야트막한 삶의 자세를 더터보게 된다.


 천구백팔십 년도에 『학생중앙』이라는 잡지에 부록으로 시집이 딸려 나왔었다. 아마도 시집 때문에 샀지 싶은. 여러 시인들의 시와 외국 시 까지도 실려 있다. 앞 뒤 표지는 온데간데없고 얼룩덜룩 말이 아니다. 이 책을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행색으로 보아서는 벌써 버려졌을 것 같은데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다행이다. 마음에 오래도록 간직한 한 권의 책이 있다는 사실이.


 맨 앞 쪽에 실린 시는 윤동주 님의 ‘서시’. 가장 나중 페이지에 ‘시란 인생의 향기와 빛깔’이라는 박재삼 시인의 글이 실려 있다. 다시금 읽어보니 너무나 진솔하다. 그 당시 무슨 말인지 몰랐을 것만 같이 주옥같은. 책이란 이래서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 본다.


 버리려 했던 것을 남편이 말렸었다. 자기 때문에 아직 보관하고 있는 것이니 이제는 자기 것이라고 우긴다. 임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보석 같은 시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는 것이 낡은 시집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내 젊은 날의 한 시점을 거닐어 보면서.

 

 다음으로 아이들 어렸을 때 읽어주던 그림책들을 맡기고 싶다. 갓 펴내기 시작한 그림책은 열악하여 제본이 약했다. 여러 아이들 손길을 타다 보니 훼손이 심하다. 재미난 이야기들이 더 낡아졌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들이 차곡차곡 그림책과 함께 쌓여있다. 정리할까 했는데 떠나보낼 때가 안 되었는지 아직 책장에 꽂혀있다. 아이들과 나와의 연결고리가 그림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마냥 쉬이 보내기가 뭣하다.

 

 책을 열면 잔잔한 말들에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숨을 몰아쉰다. 말보다는 그림에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책이 얼마나 신나는지,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아했다. 아이들 마음을 떠봤다. 막내들이 책을 버리지 말았으면 한다기에 못 이기는 척 다시 싸들고 오던. 어쩌면 그네들보다 내가 더 지나간 시간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첫 아이에게 『꾸러기 곰돌이』 시리즈를 헌책방에서 사 주었는데 얼마나 재미나게 보던지.  그때부터였다. 시장에 덤핑으로 그림책 들이 나오면 사 날랐다. 아직 그림책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서두른 출판사들은 도산을 한 때문이다. 너무 이른 보폭을 독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었던. 우리 아이들이 그림책을 읽게 된 배경이다. 그러구러 어린이 전문서점에 발을 디딜 때  이미 마주한 책들이 우아한 옷을 입고 다투어 펴내어지고 있던.

 

 수선비가 얼마나 나올까. 답은 없다. 여러 권이어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니까. 내 여력으로는 까마득한 이야기다. 한 때는 저 책들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손주들이 태어나 집에 들르게 되면 그림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보기도 했더랬다. 지네 엄마, 아빠가 읽었던 것들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 욕심을 내 보았으나 도리질을 할 수밖에. 오래되어 먼지가 나고 책 상태도 좋지 않아 건강에 해로울 것 같다. 도서관에 수도 없는 재미난 그림책들이 즐비하니.


 할머니의 일기장을 수선하여 구십이 넘은 할머니에게 선물하는 손녀. 삼십삼 년 된 결혼 앨범을 고쳐 아내에게 건네는 사랑스러운 남편이, 대대로 물려 쓰던 옥편을, 아이가 어릴 때 좋아했던 해리포터 시리즈를 수선하여 다시 선물하는 부모 마음이, 돋아나는 새싹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사람들의 삶에 대한 사랑을 엿보는 잔잔한 감동. 내 안에 고여 있는 사랑의 뒤안길을 뒤돌아보는.


작가의 이전글 동화처럼 알을 심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