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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 Dec 24. 2022

사거리

 집을 나서는데 살얼음이 깔려있다. 비도 내리고. 이런 일이 별로 없는 동네에 살다 보니 걸음을 살살 걷게 된다. 우산을 펼치기보다는 지팡이로 삼고 탈출을 하듯 좁은 계단을 내려왔다. 머리털이 쭈뼛거린다. 어두운 거리를 지날 때가 아닌 아침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더  공포스럽다. 운동신경이 부족하니 몸이 알아서 반응을 다. 부추를 신어 걸음걸이가 굼뜨다.


 아홉 시에 치러지는 시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차 시간표를 본다. 타고도 남을 거리에 버스가 오고 있어 기분 좋게 걷는데 길이 서걱거린다. 혹여 미끄러질까 새색시 걸음걸이가 된다. 육교를 내려가면 바로 정류장인데 계단 몇 개 남겨놓고 버스가 휙 지나가버린다. 환승해야겠기에 뒤에 오는 버스에 바로 오른다. 이왕에 버스도 놓쳤으니 김치찌개에 넣을 햄을 한 개 사가기로 한다. 마트 앞에 내리려고 출입문 쪽으로 미리 가 환승을 찍고 기다리는데 버스가 내려주지 않고 지나친다. 왜 멈추지 않고 가는 거지 싶었는데 벨을 누르지 않고 서 있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차가 언제 오나 살피니 십분 뒤에 온다는 표시가 뜬다. 추운데 우두커니 서 있기도 뭣해서 지나쳐 온 길을 걸어 마트에 가기로 한다. 길에 아직 살얼음이 깔려있다. 고양이 걸음으로 걷는다. 모든 사물이 새롭게 느껴진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거리에 선다. 갑자기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생각지도 않는 곳에 서 있는 나를 본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겹쳐진다. ‘캐스트 어웨이’의 마지막 장면.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서 살아남아 사 년 뒤에 겨우 자리로 돌아왔을 때 여자 친구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었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희망이 떠나버렸다. 서로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 안타까워하는 시간을 뒤로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교차로에 하염없이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앞부분을 보지 않아도 이 한 장면만으로도 무엇을 말하는지 아프게 다가오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그렇지만 어디로도 길은 열려 있고.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는. 선택만이 그의 몫이라는 듯 펼쳐진 하늘과 길.


 이제 나도 무엇을 해야 하나. 교차로에 선 것 같이 멍한 느낌. 초록신호등이 켜지기까지의 찰나였는데 여운이 길다. 마지막 학기 비대면 시험 한 시간이 지나면 4년의 과정이 끝난다. 갑자기 공백이 생길 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묘한 마음처럼 집으로 가는 길이 멀다.


 비어버린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 같다.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감당했을 나의 다른 삶의 부분들이 무엇이었을까. 느지막이 시작한 학교의 마지막 날이 오긴 왔다. 내가 있어야 할 공간이 바뀐다는 의미다.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할지. 또 다른 숙제가 발 앞에 툭 던져지는 것 같다.

 

 공부하랴, 시민정원사 심화 반 까지 나가고, 식물교실을 하느라 바쁜 나날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한꺼번에 막이 내려진 것 같다. 열심히 살았는데 휑뎅그렁하다. 이 허전함의 진원지는 어디에 닿아 있는지.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습성 탓은 아닌지 톺아보게 된다. 숨죽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일들이 너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식물들 자리를 마저 찾아주어야 하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끌어안고 사는 것에서 나를 놓아주어야 할 것 같다. 처음으로 담근 장, 된장 갈무리도 필요하다. 겁이 나 소금을 많이 넣은 것 같기 때문이다. 처음 하는 것들은 웬만큼 잘 된다. 장, 된장 맛도 괜찮다. 메주에 비하여 소금물이 작게 들어갔으니 깊은 맛이 우러나온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보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엊그제 갱신해 달라고 경찰서에 가져다준 면허증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움의 연속이라더니. 고추장 담글 고춧가루도 빻아놓았다. 미루고, 미룬 일들이 사태처럼 눈앞을 가로막는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번호를 매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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