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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 Dec 03. 2022

삶의 아치

        

  남편 양복을 사러 갔다. 어느 여름 하복을 샀던 곳이다. 원 플러스 원을 하는. 그때도 한 벌 사면 한 벌 더 준다는 말이 있었는데 왜 양복이 한 벌만 있을까. 순진해서 그걸 몰랐나 하는 근거 없는 의심을 해본다. 분명 두벌은 필요 없다고 했을 것이면서. 가끔 내게 있는 기억이 정확하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머릿속에서 편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남편은 옷집 여사장님이 권하는 대로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사이즈를 고집했었다. 조금 낀다고.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헐렁하게 옷을 입는 나에 반해 딱 맞게 옷을 입는 남편이다. 그런대로 여름양복을 잘 입었고 어울렸다.


 양복 대리점 사장님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달라진 점은 지난번에 듣지 못했던 말들을 풀어놓는다는 점. 남편이 여든둘이라든지, 서울 방직공장에 다녔던 때로부터 시작하면 육십 이년을 의류업계의 종사하고 있다는 내력을 이야기한다. 짐작해 보건대 칠십 대 후반의 나이일 것 같다. 그 연세인 대도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다니 부러움 반 존경스러운 마음이 반이었다. 바짓단을 직접 줄이고 손님에게 맞는 옷을 골라내는 녹슬지 않은 솜씨가 세월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아직도 손과 눈, 취향을 아는 감각이 살아 있다니.


 남편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돌림자인 것을 보더니 같은 종씨라고 반가워했다. 작은 거 하나에도 소속감을 가지려 하고 좋아하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 싶다. 다음 날 바짓단을 줄여 옷을 찾아온 남편이 툴툴거렸다. 어제는 그렇게 반가워하더니 오늘 옷 찾으러 가니 누구냐고, 어떻게 왔느냐며 전혀 기억을 못 하더라고 서운해했다. 누구라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 났다. 잠시 본 것으로는 단기 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바꾸어지지 않은 시간대에 살고 있음인지도 모른다.

  

 전에 갔을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필요한 용건만 이야기했더랬다. 이번에는 묻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들먹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살아온 흔적이 더 익숙하여 나누고 싶어서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부분이 약해져서 익숙한 것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닌지.

 

  그분은 남편이 세탁소를 하고 있다고 했다가, 아파 큰 수술을 했다고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은 말이다. 아마 남편은 이전에 세탁소를 크게 했지 않았나 싶은. 작년에 수술을 받았다니 이제는 세탁소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이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사이에 꼭 들어가야 하는 말들을 건너뛰기에 듣는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을 뿐. 나도 가끔 논리가 서지 않은 말을 늘어놓다가 핀잔을 들을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스포츠 의류와 교복대리점을 크게 하고, 조카에게 기술을 잘 가르쳐 성공하게도 했다고 한다. 삶의 아치를 그려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을 읽으면서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했었다. 역사 인물의 삶의 현장을 만난 듯 소설 외딴방 속 작가와 멀리 앉아서 공부하던 이는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보았다. 인터뷰를 하러 갈까 하다가 용기를 내지는 못하였다. 남편의 툴툴거림이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 개인의 삶은 역사와 맞물려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외딴방의 주인공 하나 여기 너무 당당하게 삶을 지켜왔다는 것이 못내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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