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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 Feb 09. 2023

흔적

  『초원의 집』이라는 동화를 읽었다. 1980년대 초 인기 드라마로 방영된 ‘초원의 집’의 원작이라는데 나는 못 보았다. 작가는 로라 잉걸스 와일더로 65세 때에 자신의 어린 시절의 발자취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고. 그것도 파란 줄이 그어진 초등학생용 공책에. 큰 딸이 작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엄마도 아직 늦지 않았으니 글을 써보라는 응원이다.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빌려다 줄 줄만 알았지 같이 읽지 못했던 아쉬움.


  동화라는 이미지 때문에 얼른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시작이 어렵지 그다음부터 술 술이다. 시립도서관에 5권이 없다. 예약을 걸어달라고 한다. 전에는 안내에 가서 예약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약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 주겠다며 사서분이 이용자 컴퓨터로 나온다. 검색을 해보더니 5권이 아예 없다며 자신의 자리로 가 다른 도서관에 들어가 본다. 그 많은 도서관중 한 군데 ‘마하도서관’에만 책이 있는데 상호교환불가라고.

 

  막 재미를 붙이려는데 책이 없다니 김이 샌다.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 읽었던, 오래된 책을 읽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왜 새 책을 들여놓지 않았는지. 요즘 아이들이 책을 덜 읽는다는 것인가. 서른이 넘은 딸 초등학생 때 읽던 것이니 오래된 책이다.  시간 동안 책 한 질로 연명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절판된 것도 아니고 빠진 번호까지 있는데.


  이야기가 너무 좋아 책 한 질 가지고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였는데 잘됐다 싶었다. 작은 딸에게 중고서점 알라딘에 책이 있는가 보아 달라고 했더니 바로 보냈다고. 따끈따끈한 새 책이 좋다. 양장본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것 같다. 책을 사면 겉표지는 바로 벗겨버리는데 예뻐서 그대로 둔다.


  책을 보는 내내 시냇물이 잔잔히 흐르는 평화를 맛보았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오랜만에 만났다. 작가의 부모님에 대하여 주의가 더 갔다. 나도 저런 부모님을 만났다면 어땠을까부터. 이 나이가 되어서도 부모님에 대한 아쉬움이 몽글몽글 맺힌다. 내 삶의 책임은 내가져야 하는데 자꾸 떠넘기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비겁함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나는 어떤 모습의 부모였는지까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아이들 양육했던 자취를 돌아보게 된다. 못해준 것들이 눈에 밟힌다. 작가 부모님은 네 자매를 키웠는데 지금 자손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속이 쓰리고 막막했다. 나의 이야기가 될까 봐 겁이 났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남편과 어디를 가게 되면 ‘우리 가장 젊은 날’이라면서 셀카로 사진을 찍게 된다. 어느 날 카메라에 담긴 남편 얼굴이 슬퍼 보인다. 평소에 잘 살피지 않다가 바라본 얼굴이라서 그런가.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으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랜다고 뭔가 쿵 한다. 곁에 있던 아이에게 그 말을 했더니 눈이 세모가 되어 그렇다고. 얼굴 처짐을 말하는 것일까. 반달모양의 눈이 중력에 의해 약간씩 달라지고 있긴 하다. 세월의 풍화작용이라고 해야 할는지. 바위나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다시 얼굴을 카메라에 담게 되었을 때 남편이 자기 얼굴만 크게 나오게 찍는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알겠다며 이번엔 내 얼굴이 크게 찰칵.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려는 얕은수가 드러난 것 같아 조금 찔렸다. 이번엔 두 사람 눈이 다 슬퍼 보인다. 반달눈이 세모로 바뀌어가느라 그러는지, 인생이 힘들어인지 알 수가 없다. 얼굴만으로도 지나온 세월이 보인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 가슴이 철렁한다.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튄다. 가족 카카오톡 방에 “얼마 전 아빠가 사진을 찍었는데 눈이 너무 슬퍼 보였어. 찬이에게 물어보니 눈이 삼각형이 되어서 그렇다더라. 오늘 다시 셀카를 찍었는데 엄마, 아빠  눈이 슬퍼 보여.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아니라 눈이 깊어서 슬픈. 너희들 결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아. 엄마 아빠 눈이 더 세모가 되고 더 물기를 머금기 전에.” 날이 저물기까지 아무도 대답이 없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큰 딸 “흠 그런데요. 우리가 결혼하는 거랑 두 분 눈이 슬퍼지는 거랑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스스로의 행복이랑도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고요. 우리 결혼 이야기는 안 하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요즘 결혼하라고 하면 꼰대입니다.” “꼰대 하지 뭐. 아빠는 00세, 엄마는 00세.”

 곧이어 활화산이 솟구치고 공룡들이 사정없이 뛰어다니는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언뜻 감이 오지 않아서 무슨 말? 했더니 이번엔 털도 없는 공룡이 부르르 화를 내고 거기다 품에서 옐로카드를 꺼낸다. 그제야 속뜻을 알게 되어 아이고! 레드카드 아니라서 다행이야. 조심하라는 거네.


  마음속 카메라는 다른 곳을 비춘다. 우리 동네 자유시장이다. 부쩍 늘어난 동남아에서 온 분들이 차린 채소 가게들. 모국어가 아닌 말소리들이 여기저기 웅성웅성. 시간이 흐르면 아예 다른 나라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이 되지 않을까. 몇 세대가 흐른 뒤에 우리들도 로라 잉걸스의 가계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는지. 인구 절벽에 대한 걱정까지 밀려든다. 이 땅에 와서 한 땀 한 땀 수놓았던 흔적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떨린다. 그것도 하나의 미련일지도 모르지만. 결혼을 안 하겠다는 딸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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