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단순해지고 있다. 구구절절하게 이것저것 세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신다는 마음이 있기도 하지만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도 모른다. 자녀가 성장한 뒤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독립적인 마음을 원하는 것일까. 때로 긴급한 요청을 하지만 아무리 바라고 애타할지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것과, 은혜를 놓치지 않고 누리게 해 주시라는 것으로 뭉뚱그려졌다. 젊었을 때는 예수님 곁에 앉아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발동동거리며 일하는 마르다가 마리아를 불러도 소용이 없자 예수님께 저를 좀 도와주게 마리아에게 부탁해 달라고 한다. 그때 예수님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마리아는 좋은 쪽을 택하였다며 그대로 둔다. 오히려 칭찬같이 느껴졌다. 내 맘대로의 해석이겠지만 나도 마리아처럼 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잘할 수도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잘하려고 버둥거렸던 마음을 좀 내려놓으니 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나의 삶이 마리아와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르다와 같이 일이 많았다. 여섯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일의 양을 가늠할 수 있다. 벅차서 늘 괴로움에 시달리는데 몸만이 아닌 마음이 더 문제였다. 마음은 너르지도 않은데 넓은 것처럼 보이려니 더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가지 모습이 내 안에 있어 괴로워했다. 마르다 같이 살 처지인데 마리아처럼 살고 싶어 한하던 시절. 강박처럼 잘해야 된다는 기준에서 돌아서서 잘 못해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위선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다 잘할 수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은행잎이 꽃비처럼 나리는 나무아래 해맑게 웃는 친구들을 보며 내 마음도 눈부신 은행잎처럼 노랗게 웃었다. 위로라는 것은 함께하여 웃는 것이다. 해지는 바다에 같이 있는 것. 친구네 집에 있는 것 같다는 카페에서 늘어지게 커피를 마시는 일이다. 꿈같은 시간. 집 가까운 호텔에서 같이 자며 이방 저 방 건너 다니면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
이런 일들을 뒷받침이라도 하는 듯 식물교실에 가지고 들어갈 물건이 배송사고를 일으켰다. 소설에 있는 장치들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 ‘발송완료’라는 말과 함께 주문한 물건의 흐름이 파악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밀려오는 불안. 주문한 곳에 전화를 했다. 발송한 물건이 없어졌다고 다시 보낸다고. 부랴부랴 식물교실 들어갈 곳과 시간을 조정했다. 그런데 내 목소리에 걱정과 미안함 보다는 신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저쪽에서 눈치챘을까 봐 전화를 끊고 나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오후에 들어가는 근로 지원도 전국체전 때문에 쉬고 식물교실도 뒤로 밀렸으니 친구들과 쭉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이 맞추어졌다. 마지막 날에 식물교실 끝내고 가까운 곳에서 배말 칼국수와 톳 김밥을 먹자고 카카오 톡에 올리면서 계획은 바뀌라고 짜는 것이라고 별표를 쳤었는데.
여유 있게 노닐고 정원카페에 가서 이야기하고 고즈넉하게 가을이 된 우리가, 가을 속을 거닐었다. 믿음의 친구들이 몰고 온 에너지가 방전 직전에 있던 나에게 힘을 나눠주는 기분이다. 태양열 등처럼 다시 빛날 수 있겠거니 싶다. 등은 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밝히는 것이 저의 할 일이다. 서울로 친구들이 올라가고 참았다는 듯이 날씨가 추워진다는 보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