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은 무채색에서 매화꽃 색으로 옅은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는 중이라면 사월은 볼터치 정도 화사해지는 시간이려나. 더 나아가면 진달래 빛깔의 연지를 바른 아가씨.
‘화사해지는 계절
사월의 색으로 화관을 만들어요.
꽃들이 깨어나는 고운 날에
손끝에서 마음을 피워내어요.’
사월에 있을 식물교실 안내 멘트다. 미리미리 알려 일정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오월에 잡으면 좋겠는데 꽃값이 비싸서 이른 달을 택하였다. 본보기 화관을 만든다. 사진용으로. 생화를 사서 만들기 뭣해서 말린꽃으로. 노랗게 마른 수선화의 자태가 그대로다. 카네이션도 색이 머금은 그대로 멈췄다. 라벤더는 은빛이고 버들도 뽀송뽀송하다.
철사로 동그라미를 만든다. 꽃 테이프로 감으니 초록의 링이 된다. 라벤더로 바탕을 두르고 하나하나의 꽃을 꽂아가니 그럴싸하다. 나중 마취 목 이파리를 장식한다. 연초록이 들어가니 꽃들이 더 고운 색을 얻는다.
남편에게 “이것 좀 써보세요.” “난 동막골 안 한다.” “여일이는 귀에 흰 꽃을 꽂았는데” “어쨌든 나는 안 쓴다.” 머리에 얹은 모습을 보려 했는데 못하겠다니 어쩔 수 없다. 나이가 있어 화관을 쓰면 젊어지는 샘물도 아니고 오히려 이상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아이들이 쓰면 너무 예쁠 것이라는 기대로 남겨 두었다.
어릴 때부터 화관을 늘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 어렸을 때 시계 꽃을 잔뜩 뜯었다. 머리 따듯이 세 줄로 엮어 나가면 화관이 되었다. 돌려가며 써보게 하였다. 아이들이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때 나도 써보았는지. 나를 위한 화관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뭐가 그리 애석해서 식물교실에까지 마음을 옮겨놓으려는 것일까.
엄마 아빠와 같이 화관을 만들면 기억 속의 어느 날이 꽃으로 환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여유 한 자락 여며주고 싶은. 작은 마을도서관에서 수런수런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웃음소리도 끼어든다. 너무 예쁘다며 엄마도 아빠도 써보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화관을 씌어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향내 나는 이런 수업을 빨리 하고 싶다.
요즈음 성형이 자연스러워진다. 아직 점하나 빼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입 주변의 주름을 보톡스라도 맞아 펴고 싶다. 동막골의 여일이는 영화를 찍고 성형을 했던 듯하다. 그 뒤로는 마땅한 배역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보았었다. 개성을 잃어버리고 표준 미인이 되어 버릴 때 오는 공허함이 아닐까. 외모는 째고 빼고 절개를 하여 편다지만 마음의 성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지금 마음을 성형 중. 봄꽃들을 보며 구겨진 마음의 주름살을 편다. 그것도 욕망의 한 갈래 같아 멋쩍다. 꽃 중독. 나만 그러고 싶지 않아 일터에도 꽃을 들고 간다. 집에 없는 수국종이라서 일찍 꽃을 보고 한 번 더 피게 하려 한다든지. 꺾꽂이를 하여 개체수를 늘리려 한다는 핑계가 수증기처럼 피어난다.
별 수국을 조금 비싼 값에 샀다. 그것을 일터에 가지고 가서 모두 같이 본다. 값으로 계산하면 엄청 싸다고 나를 다독인다. 그 정도는 해도 된다는 나만의 계산 법칙이 작동한다. 푸르스름한 색이었다. 슬퍼 보이는 색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이번에는 댄스파티라는 이름의 수국과 히나미츠리의 분홍의 경쾌한 수국을 또 받았다. 토분에 옮겨 심는다. 파란 수국과 바꿔 오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