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지워버린
남편과 차를 타고 집에 오는데 횡단보도에 폐지가 실린 리어카가 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다. 리어카에서 떨어진 박스를 줍고 있다가 일어선 어떤 할머니 모습이 이십여 년도 더 된 그 할머니와 겹쳐 보였다. 순간 뭔가 들킨 것 같이 가슴이 내려앉는다.
우리가 세 들어 살았던 맞은편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그 할머니는 폐지를 모아 살고 있었다. 고향이 대구라 했고, 자식과는 왕래가 없었다. 같이 살던 열 살 연하 할아버지는 교도소에 있었다. 무슨 잘못을 하여 거기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뭘 가져오면 나눠드리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잘하는 것이려니 싶었는지도.
어느 날 할머니는 독극물이 들어있던 항아리를 만진 손으로 눈을 비볐는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남편은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다녔다. 할머니의 눈 치료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움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쉬이 아물지도 않았을뿐더러 나중은 눈두덩 위와 머리까지 가려워서 오래도록 고생을 하였다. 할머니는 결국 한쪽 눈을 실명하였다. 그 후로 남편은 할머니 이사를 도와주고 이런저런 일들을 거들어 주었다. 매번 교도소에 할아버지 면회를 갈 때 모시고 다녔다. 물론 할머니와 이야기 끝에 남편이 면회를 같이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문제는 할머니가 꼭두새벽부터 빨리 가자며 와서 기다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도 덜 깨어 문을 열어주고 부랴부랴 아침을 짓고. 교도소까지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남편이 몇 번이고 빨리 가보았자 면회시간은 당당 멀었다고 통사정을 해도 다음번 면회 가는 날 시계를 보면 새벽 다섯 시 조금 넘어 있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으로 미워했는지 모른다. 남편을 고생시키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잘도 참아주고 그 할머니를 도왔다.
그런 할머니가 어느 날 나에게 따로 인사도 없이 대구로 이사를 갔다. 어떻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났을까 싶어 서운했다. 지금 같으면 내 쪽에서 먼저 인사를 드리고 이별을 했을 것인데. 그때는 그런 주변머리가 없었다. 그 뒤로는 까마득하게 그 할머니에 대한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지낸 세월이 거의 이 십여 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 할머니와 비슷한 모습을 보고 마음을 들킨 것 같이 화들짝 놀랐다고 해야 할까?
“그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게. 그렇게 이사 가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대구 주소만 보고 모셔다 드렸는데, 여기보다 집이 더 엉망이었어”
“당신이 모셔다 준 거예요? 나는 그걸 왜 기억을 못 하지. 지금쯤 돌아가셨겠지요. 그래도 아들이 대구에 있다고 했잖아요?”
“아들이 어머니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좋았을 텐데.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셨을 거야.”
나는 그때 상황을 잊어버렸나 보다. 한창 아이들이 어릴 때라 남편이 말 안 했나?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기억에 없다니. 어쩌면 그 할머니가 이사 간 것을 다행이라 여겼던 것은 아닐까. 남편 고생 덜하게 생겼다고 속으로 좋아했었나?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때를 지워버린 것 같다. 그런 속내를 보이고 싶지 않아 마음을 감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과 이타적인 마음 사이 어디쯤에서 갈등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가끔 나 자신이 신데렐라에 나오는 새엄마처럼, 콩쥐팥쥐에 나오는 계모 같이 남편을 속이는 것만 같다.
남편의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빠져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흐름을 마주한다. 여러 면으로 여유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하여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반은 나의 책임이라 여기기에 안쓰럽게 여길 뿐이다. 어쩌면 나의 부족함을 가리고 싶어 타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따스함에 기대 나는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도 따스함이 배인 것 같다. 개성을 조금씩 나누고 서로 고운 물이 들어가는 것이 부부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었을까 궁금해진다. 남편에게 한 번 물어나 보아야지.
그 할머니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여며 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