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빛들이, 그 열들이
꽃나무들이 숨죽이는 계절. 저마다 안으로 양분을 저장해 두고 스스로 잎을 떼어 냈다. 따뜻한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뼈만 남은 앙상한 나무들이 측은하고 안쓰럽다. 꽃을 키우는 나도 피어날 꽃들을 생각하면서 버티는 시간이다.
작은 비닐하우스를 산 지 몇 년. 낡고 해져 바람이 드나든다. 나의 열정도 조금 사그라져 고장 난 지퍼를 어떻게 해 볼 생각보다는 나무들이 스스로 견뎌내기를 바란다. 날씨가 너무 춥지 않기를 원하면서 다가올 겨울에는 새 비닐하우스를 장만해야겠거니 한다. 무엇이든지 시간이 지나면 낡고 해진다.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면 나무요 꽃이다. 작년에 샀던 크리스마스로즈가 흰 꽃을 소담스레 피워냈다. 꾀나 가격을 주고 샀기에 다시 꽃을 볼 수 있어 좋으면서 여러 감정들이 교차한다. 로즈가 스스로 잘 살아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내가 관리를 잘한 것이라며 자조 섞인 위로를 한다. 한겨울에 다시 피는 꽃을 보는 즐거움이라니.
크리스마스를 장식했던 양초가 고대로 남았다. 두 해를 연이어 썼더니 다가올 크리스마스에는 목이 긴 흰색양초로 바꾸고 싶어졌다. 색색의 양초를 어떻게 쓸까 고민한다. 어느 날 온도가 많이 내려간다기에, 밤늦게 비닐하우스에 촛불을 켰다. 토분에 초를 넣고 불을 켠 뒤 빈 화분을 씌웠다. 새어 나온 불빛이 예뻐서 아이처럼 신났다. 성경에는 불을 켜 등경위에 두라 했는데, 나는 촛불을 켜 숨겨놓았다. 빛의 용도가 아닌 열을 내기 위해서이다.
생각해 보면 숨겨놓은 빛들이 여럿이다. 방 및을 흐르는 보일러도, 밥을 하는 밥솥도, 냉장고를 돌아가게 하는 것도 보이지 않은 빛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작년에 같이 일하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남편 직장 따라가고 없다. 사십 대 중반이었지만 결혼을 빨리해서 중학생 딸아이가 있었다. 젊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참 좋아했다. 기동성이 있고 친절해서인지 뭘 자꾸 시켰다. 그럼 뒤에 남은 나는 그녀가 할 일들을 묵묵히 했다. 우리가 담당한 사람들은 성실하여 추운 겨울이고, 더운 여름에도 한 결 같이 운동을 하는 이들이었다. 체육활동을 도와주는 우리도 항상 함께해야 했다. 그녀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내가 채웠는데 그녀만 도드라지고 숨겨진 나의 공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짝에 보이지 않았다. 어제 휴식시간에 운동하다가 그녀의 말이 나오자 나를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볼맨소리가 나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느냐며 항변 비슷한 것을 하다니. 숨어 있는 역할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나를 알아주지 않음에 대한 서운함이 터져 나온 것만 같아 께름칙하다. 속으론 이 사람 저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고 칭찬을 받았던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뒤에 남겨져 그녀의 일을 대신하여 준 것이 억울하여 불평불만이 터져 나온 것인지.
겉만 보고 속내는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얕은 이해력에 화를 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때그때 이야기를 하고 상황을 바로잡지 않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이제와 알아주지 않음에 대하여 열을 내다니 비겁하다. 나 자신 이 정도밖에 아닌가 싶어 실망이다. 공정함을 잃은 사람들의 속내에 돌 직구를 던지고 싶은 것인지,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데에는 나의 공이 절반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자존심인지. 나는 숨어있는 빛에 만족하기보다 등경위의 빛이 못되어 억울해한다.
그렇게 보면 이 사회는 숨겨진 빛들로 인해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빛은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맡아내면 되는데. 화분 속에 숨겨져 열을 내는 양초처럼.
아침 일찍 하우스 안의 온도계를 본다. 휴대폰에서 마이너스 십 도라고 확인했는데, 비닐하우스 온도는 영도다. 양초 두 개가 타서 이 정도의 열을 낼 수 있나 싶다. 비닐하우스 안이 어느 해보다 빼곡하다. 꺾꽂이했던 어린 수국들을 들여놓아서이다. 해묵은 나무들은 바깥에서도 잘 버텨 내는데 어린 묘목들은 추위에 약하다. 수국 원예종은 월동 온도가 낮아 안에서 겨울나기를 해 주어야 꽃을 볼 수 있다. 꽃눈이 얼어 내내 깻잎 닮은 무성한 잎만 보는 것은 꽃 지기에게는 고댄 시간이다.
숨겨놓은 양초의 빛이 난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아마도 봄에는 그 빛들이, 그 열들이 꽃으로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