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화

by 민진

새 소리 사이를 가로질러 새벽이 온다. 햇귀로 밝아오면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더 자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밖으로 나와 화분을 둘러본다. 우쭉우쭉 자란 것들은 내 눈을 피하지 못한다. 어제는 국화를 싹둑싹둑. 그대로 키우면 멀대같다.

한 녀석이 남아있다. 짙푸른 가지와 잎을 자랑하며 나폴 거린다. 오며가며 볼 때마다 눈을 흘긴다. 왜 이리 무성한 거야. 꽃도 보여 주지 않았으면서 뭐가 그리 당당해. 그러거나 말거나 저 할 일 하는지 푸름 가득안고 뻗어가고 있다. 곧 전정가위를 들지 않을까 싶게.

지난 해 친구가 꽃이 너무 예쁘다며 삽목을 하라고 몇 가지 주었다. 꽃을 안 봤기 때문에 반신반의 하며, 주는 것을 거절 못하기에 가져왔다. 플라스틱 화분에 대충 꽂았다. 마음을 주지 않고, 살면 살고.


마음 한 자락 내어 주어야지 내 사람이 된다. 깊은 곳으로부터의 끄덕임이 필요하다. 속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지켜보면서 정하겠다는 뜻인가. 먼저 주고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데.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못 견디는 때문이리라.

뿌리를 잘 내리고 쭉쭉 자라났다. 가을 쯤 되어 치렁치렁하자 눈과 손이 참지 못하고 고분고분하고 얌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별 기대 없이 친구가 준 것이기에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람대로 바람에 팔랑팔랑 거리며 진초록으로 신났다. 잎만 보아도 괜찮지만 초화류의 목적은 꽃에 있다.


친구가 꽃이 피었다며 사진으로 자랑을 해왔다. 겨울을 지나 황량한 가슴에 불어온 첫봄 첫 꽃 다시 첫사랑이다. 내 화분을 본다. 꽃이란 꽃 자도 아른거리지 않는다. 얘가 왜 밥값을 안 하는 거야! 투정 비슷한 감정이 돋는다. 꽃도 안 피었으면서 잘만 자라네. 쓴 소리만 싣는다. 비대면 강의에서 개나리는 꽃눈을 유월에 만든다고. 전정을 하려면 꽃 지고 나서 바로 해야 한단다.

영춘화를 원해서 키우게 되었다면 공부를 했을 것이다. 알려고도 않고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다. 개나리와 비슷한 물푸레나무 과이다. 잎이 나기도 전부터 피워내는 봄의 소식 꾼이데. 꽃눈이 생긴 줄도 모르고 지난 가을에 사그리 잘랐던 손을 들여다본다. 말은 못하고 꽃 마음이 어땠을까. 올해 유난히 자람을 많이 한다. 오는 새봄에는 못 다 핀 꽃 한 송이까지 피워내려는 듯. 그렇게나 일찍 꽃눈을 만들어 숨기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그랬어. 올해도 조금만 늦었다면 손가락이 간질거려 나쁜 짓을 하고 말았을 텐데.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가 엄마 이야기를 했다. 장독대 옆에 피어나던 꽃들이 엄마 얼굴로 보여 온다고. 분꽃의 향기는 엄마의 냄새라며. 봉숭아가 피어나는 계절이 오면 더욱 애가 단단다. 봉숭아는 함초롬하게 흰색과 연분홍 빨강색으로 피어났다. 이슬처럼 매단 꽃과 이파리를 딴다. 잎이 무슨 물이 들까 싶지만 꽃물만 들인 손톱은 바삐 연해진다. 진한 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잎을 넣어야 한다. 백반과 숯과 소금을 넣어 공이로 찧는다. 잘게 부서진 것들을 뭉쳐 손톱에 살짝 올리고 비닐을 덮고 고무줄로 묶는다. 조심조심 놀다보면 손톱은 보이지 않고 손가락부터 물이 들었다. 얌전하게 봉숭아꽃 쌓인 손을 받들고 다니며 사분사분 한다. 하나 밖에 없는 딸에게 물 들여 주던 사랑. 첫눈이 올 때 까지 손톱 뿌리에 꽃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던, 떠나신 엄마는 친구 가슴에서 꽃으로 추억으로 다시 피어난다.

어린 마음에도 꽃 키우는 집을 너무나 부러워했다. 아련함을 이 나이에도 잊지 못한다. 그 시간의 꿈을 찾아 꽃으로 꽃으로만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텃밭에 봉숭아도 났다. 딸과 나도 손톱에 사랑을 그려 넣어볼까.


그리움이란, 사람에게만 한정지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정취의 목마름도 어느 순간에 터치는 그리움으로 울컥한다. 다시 꺼내 보는 사진첩처럼 내 안의 갈증을 적셔줄 한 모금의 물이 필요하다. 애달음도, 자연의 일부도 공기와 같이 결핍을 기억한다. 그것들이 욕구로 자라나 맴돌고 어느순간 파고드는지도 모른다. 마음 밑바닥에 꽁꽁 숨겨져 묻힐 뻔 했던 꿈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아른거린다. 자유와 사랑과 고움을 찾아 라고. 어쩌면 우리는 평생,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이라는 꽃을 찾아가는 벌 나비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