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라기 공원에 가면 소나무 삼대가 살고 있어요. 조사해서 과제로 제출하세요.” 촌에서 자랐고 가까이 살아온 나무 아닐까. 삼대라는 말에 머릿속이 하얗다. 소나무를 구분하여 심었다는 말인가. 삼 년을 내리 심었나. 나무에도 가족이 있고 일가친척이 있는 것일까. 공원으로 가 살펴본 소나무는 너무나 컸다. 세 그루. 손전화기에 담으려 해도 멀찍이 하늘과만 놀려고 한다. 십 미터 이상은 될 것 같은 나무는, 겨우 밑 둥이나 줄기가 담길 뿐 이파리는 아스라했다. 분명 이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 같은 데.
송화 가루가 끝도 없이 날린다. 마당이 연노랑 가루로 뿌옇다. 산은 멀다. 화분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는 내년에나 솔 꽃이 필 것 같고, 아랫집에도 한그루 심겨 있는데 그 녀석도 감감하다. 텃밭에 다녀오다가 솔 순 끄트머리에 자주 빛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암꽃을 본다. 송화 가루는 다 날려버려 수꽃은 흔적이 조금 남아있을 뿐. 소나무는 풍매화로 수분수정을 한다. 암꽃이 멀리서 날아오는 송화 가루를 몸 안에 들이려고 솔 순 가지 끝에 꽃단장을 하고. 좋은 자손을 남기고 싶은 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비슷한가. 같은 나무의 꽃가루는 피하려고 새로 돋는 가지 끝닿은 데에 가 있나. 건강한 후손을 남겨야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을까. 태어나서 세 번째 해 가을이면 독립을 한다. 요즘은 흙보다는 이곳저곳이 시멘트로 벌겋게 발라져 있다. 솔 씨를 바람에 날리면, 좋은 땅을 찾아가야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한 나무에 삼대가 같이 살고 있다. 작년에 수정하여 자라고 있는 솔방울은 자식들이고, 올해 갓 피어난 꽃들은 손주들이다. 가을학기에 나온 숙제였으니까. 소나무 꽃은 볼 수 없었다. 자라고 있는 연둣빛 솔방울들과 갈색으로 익어가는 솔방울들을 카메라에 담고, 인터넷의 도움을 받았다. 가까이 있는 것들을 우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겨울이면 뒷동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지금이야 보일러로 난방을 하지만 내 어릴 때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방을 데웠다. 소나무들이 잎들을 떨구어주면 갈퀴로 긁어왔다. 나무를 하노라면 키 작은 정금나무에 자금자금 한 열매들이 거뭇하게 달려 있다. 블루베리 종류 같다. 새금하면서도 달달한 맛 때문에 나무를 하다가도 새처럼 따먹었다. 입 주위가 거무죽죽해진 줄도 모르고. 빨갛게 익은 맹감과 노박덩굴의 열매들이 꽃처럼 피어났는데.
갈색의 솔잎들을 긁어모아 수북이 쌓는다. 마무리할 때쯤이면 여분의 나무로 내기를 한다. 두 사람이 한 무더기씩 가져와 모은다. 갈퀴를 빙그르르 돌려 엎어지면 아들, 누우면 딸이 되었다. 엎어진 사람이 이긴다. 모아놓은 나무를 제 것으로 가져간다. 내 갈퀴는 늘 편한 것만 좋아했다. 억울해서 한 번 더. 또 진다. 새끼줄로 커다란 베개 같은 나무둥치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길은 못내 아쉬웠다.
올봄에도 산에 들에 온갖 꽃이 피어났다. 저것도 꽃인가 싶은 관심을 두지 않으면 눈치도 채지 못하는 미미한 것도 있다. 꽃은 화려할수록 향기가 옅다. 자연에게 주어진 순리가 아닐까. 아주 먼 옛날 색깔을 택할래, 향기를 택할래? 질문을 받지 않았을까. 밋밋한 꽃 색을 지녔던 나무들이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보석 같은 열매들을 매달고 자랑처럼 일어선다. 꽃은 열매를 위하여 있는가. 소나무 꽃들이 봄 한철을 지나고 엷은 보랏빛으로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