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by 민진

벚꽃 피면 가려나. 송화 가루가 날려도 아무 말이 없다. 장미가 피어나고 아카시아 향기가 달콤해도 어둠 속이다. 나의 의무는 없어질지도 모른다. 장롱 속에 갇혀 숨만 쉬고 있다. 언제 이곳에서 꺼내어 푸르른 녹음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으로 데려갈 것인가.

뻐꾸기가 울기 시작했다. 오월이 지나려 하고 유월이 쏜살같이 내달려오고 있다. 장롱 문이 열린다. 혹시 나를 데리고 나갈까.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살핀다. 이태원 사건 때문에 코로나가 다시 퍼지며 어수선하다. 기대를 내려놓았는데 무슨 일일까. 손이 나를 더듬는다. 손잡이를 든다. 이제 나도 할 일이 생긴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알지 못하니 너무 좋아하지 말자.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지. 적당히 좋아하는 것을 배웠잖아. 세상만사 너무 감정적이면 다쳐. 마음을 눌러놓으면 덜 아프잖아. 혼자 힘들고 말면 그뿐. 모두들 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니까.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간다. 먼지를 턴다. 혹여 무슨 말이라도 할까, 귀를 쫑긋 세우지만 그냥 방으로 데려간다. 책이라도 넣으려나. 기다려 봐도 아무 일 없다. 장롱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하고 조용히 심호흡을 한다.


날이 밝았다. 바쁘다. 부엌에서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뒤에 노트와 필통과 전화기와 지갑을 내 안에 밀어 넣는다. 나를 둘러맨다. 등과 한 몸이다. 얼마만인가. 떨어지지 않으려 꼭 붙는다. 책이 없어 덜컹거린다. 음악소리처럼 들린다. 여기에 책만 몇 권 구색을 갖추면 얼마나 아늑할까. 내 짝지도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학교를 삼십 분이나 일찍 갔다.

백주년 기념관 정문이 닫혀있어 뒷문으로 들어간다. 휴대폰을 자꾸 들여 다 보는 것이 강의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엊그제 과대표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답이 없었나. 코로나 때문에 세 반으로 나뉘어서 강의를 듣는다던데. 여기저기 카카오 톡을 보낸다. 답장이 없는가.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간다. 늦깎이 학생이 당황한다. 학사정보 관리팀이 있는 본부로 내달린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일동은 평생교육원생만 들어간다고 했던 것을 믿다니.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니까. 다른 학생도 온다. 같이 뛰듯이 강의실로 오른다. 다행히 교수님이 아직이다. 조교가 온도를 재고 연락처와 이유를 기록한다. 손소독제를 바르라고 하는데 약간 짜증을 내는 것 같다. 힘을 팍 주어 누르니 내용물이 쏟아진다. 후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자리에 가서 앉는다. 입들이 하얗다. 교수님이 온다. 거리두기를 한다고 널찍널찍 떨어져 앉았다. 나를 옆 의자에 앉혔다. 짝지처럼 대우해 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날개가 있다면 날아올랐을 텐데. 짝꿍 눈이 반짝거린다. 귀가 커진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라고 말해준다. 내 소리를 못 알아듣나. 좋은 것을 너무 표 내면 좀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내용에 빨려 든다. 새로움을 알아가는 것이 그렇게 좋을까. 이래서 대면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교과서가 절판이 되어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아쉬워한다. 꼭 사고야 말겠다고 다지는 것 같다.


집에 오자마자 진주문고에 전화를 건다. 없단다. 소소 책방이란 중고서점에도. 전공서적은 알라딘에 주문하라고 친절한 아저씨가 알려준다. 아들에게 부탁하니 한 권이 있단다. 이틀 후에 책이 왔다. 도착한 실내 조경학 책에는 낙서 하나 없이 깨끗하다. 만족한다. 다시 일주일 만에 학교 나들이를 가는 날이다. 드디어 내 안에 들어온 책 한 권! 음 이 냄새 향기로워라. 드디어 나는 책가방이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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