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소비한 문화 콘텐츠를 기록하고, 소개하는
[문화 일기 2021] 10월 호 - 영상 편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덧 11월의 끝자락에 도착해서, 10월에 보고 읽은 문화 콘텐츠 이야기를 이제야 풀어놓는다는 게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기억을 되살려 찬찬히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월의 영화
- 쁘띠 마망(2021): 내 마음이 너와 같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톰보이> 감독인 셀린 시아마의 영화 <쁘띠 마망>
두 영화 모두 재밌게 본 나로서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화를 보러 갈 이유가 충분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 '마리옹'과 함께 할머니 댁으로 내려온 '넬리'는 할머니 댁에서 머무르는 동안 엄마와 이름이 같은 '마리옹'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사실 '마리옹'이라는 친구는 어린 시절의 엄마였으며, 마리옹의 집은 넬리가 묵고 있는 할머니 댁과 같았다. 그렇다고 이게 넬리의 환상이라든가, 시간 여행을 주로 다룬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정말 그 자체로 존재한다. 어린 시절의 '마리옹'이 '넬리'의 친구로 존재한다. 과거의 할머니와 마리옹이 살고 있는 집 또한 존재한다. 엄마인 마리옹이 어렸을 때 만들었다던 오두막 아지트 또한 숲의 가운데에 존재하여,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기준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넬리는 혼자 오두막 아지트를 고치고 있던 마리옹과 만나게 되고, 친해져서 집을 오가기도 한다. 유품을 정리한다고 짐을 거의 다 뺀 할머니 댁이 아닌, 마리옹과 마리옹의 어머니(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보면서 넬리는 잠시 혼란스럽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어린 시절의 모습인 마리옹과 친구로서 잘 지낸다. 엄마의 어린 시절이라기보다는, 친구로서 마리옹을 대한다. 수술을 앞둔 마리옹과 곧 헤어져야 하는 넬리는 마리옹에게 자신의 비밀을 얘기한다. 자신의 비밀이면서 곧 마리옹의 비밀이기도 한. 자신이 먼 미래의 마리옹의 딸이라는 말과 함께, 아마도 진짜 이야기하고 싶었을 비밀인 자신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 얘기를 받아들인 마리옹은 넬리에게 말한다. 너는 이미 내 마음속에 있으니, 내 마음에는 이미 네가 있으니 내가 너 때문에 힘든 건 아닐 것이라고. 넬리의 비밀이면서 곧 마리옹의 비밀이기도 한 비밀을 공유한 둘은 헤어지기 전 배를 타고 함께 노를 저으며 강을 돌기도 한다. 이때 삽입되는 노래의 가사가 인상 깊다. "내 마음이 너와 같다면."
엄마 아빠에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아빠에게 어렸을 때 두렵고 무서웠던 것을 물어보는 넬리의 마음속에는 차마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묻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남은 비밀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엄마의 짐일 수도 있다는 무서움 말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아이를 만나 성장한다. 친구인 마리옹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넬리는 분명 한 뼘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넬리도 이런 고민을 품은 아이의 귓속에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을 웃으며 속삭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넬리의 아버지가 무서웠던 게 뭐냐고 묻던 넬리에게 '아버지를 두려워했지.' 라며 웃으며 속삭였던 것처럼 말이다.
- 펄프픽션(1994): 삶은 우연과 운명 사이 장난 같은 허무함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입문하기에 좋다는 <펄프픽션>
한 영화 안에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있다. 개별 에피소드처럼 존재하면서 결국엔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는 것이 재밌었다. 94년도 작품이라는 걸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 정보를 찾아보면서 처음 알고, 놀랐다. 기술이 너무나도 발전해 거의 30년 전에 제작된 영화도 높은 해상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전혀 촌스럽지 않았던 의상 때문일까. 캐릭터들의 대화 사이에서 가볍게 유머 코드처럼 소비되고 지나가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 발언과, 에피소드 중 납치감금 변태 강간범으로 나오는 동성애자 캐릭터들이라든가 영화를 보면서 거슬렸던 포인트들을 제외하고는 약 30년의 시간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30년이라는 시간이 체감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앞서 언급한 '거슬리는 포인트'들이 여전히 영화 속에 등장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식당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려는 강도 커플의 에피소드로 영화가 시작하고, 조직원인 빈센트가 보스인 마르셀러스의 부재로 그의 아내인 미아와 함께하는 에피소드와 마르셀러스와 부치의 에피소드 그리고 빈센트와 쥴스의 에피소드가 서로 연결되며 이어지다가 강도 커플의 에피소드로 다시 돌아와 연결되고, 끝이 난다.
이 영화를 삶과 죽음은 장난같이 허무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오락 영화로 보라는 사람들도 보았다. 나는 이 영화가 삶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사람(빈센트)과, 운명적 계시라고 보는 사람(쥴스) 그리고 삶의 장난 같은 허무함 이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쥴스는 마구잡이로 총을 쏘는 사람에게 총알을 한 번도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고, 조직의 일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는 운명론적 입장의 사람이고, 빈센트는 그런 쥴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쥴스가 말하는 계시 같은 사건들은 모두 우연의 일치라고 보는 사람이다.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식당에서 계속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 식당에서 강도짓을 하려던 강도 커플을 만나게 된다. 쥴스는 강도 커플에게 자신의 남은 현금을 준 채 보내고, 이렇게 너희를 보내면 내가 너희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며 이전의 모습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쥴스를 빈센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식당에서 함께 나오게 되는데, 영화로서는 이게 마지막 장면이지만 그 앞에 빈센트가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한 걸 생각하면 삶과 죽음은 장난같이 허무하다는 것도 보여주는 듯했다.
또 한편으로는 정말 선의로 사람을 살리지 않은 건 빈센트 뿐인지라, 빈센트가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사실은 여기 등장하는 대다수의 캐릭터들이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과 관계가 없는 허무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조금 더 크다.
-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2016):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나는 나일까?
우편배달부로 소소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타게루는 자전거 사고로 찾아간 병원에서 자신이 시한부라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날 밤,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외형을 한 '악마'가 찾아와 타게루에게 남은 생은 하루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신에, 하루에 한 가지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동의하면 수명을 하루씩 늘려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악마'가 다녀간 다음날, 세상에서 전화가 사라졌다. 전화와 함께 전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되고, 전화를 통해 만났던 타게루의 첫사랑 또한 타게루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악마'는 영화를 없애겠다고 하고, 세상에서 영화가 사라졌다. 영화가 사라지자 대학 때부터 타게루에게 영화 dvd를 추천해주던 친구와의 관계 또한 사라져 버린다. 주위 사람들을 잃어가면서 괴로운 타게루 앞에, '악마'가 또다시 등장하고 이번에는 고양이를 없애겠다고 한다. 타게루가 삶을 하루 더 연장하려면,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타게루의 고양이 또한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처음에 전화와 영화가 사라졌을 때, 단순히 전화와 영화라는 아이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아주 다른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단순히 영화 dvd 대여점이 다른 업종으로 바뀌는 세상이 아니라 영화라는 아주 영향력이 큰 대중 매체가 소멸한 세상은 머릿속에서도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현재 내 삶의 아주 큰 부분이기도 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이것들이 없는 삶을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타케루였다면 나의 삶을 하루 연장하기 위해, 나의 삶과 관련된 것들과 사람들 모두를 잃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전화나 영화 같은 것을 위해, 보장된 내일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 역시 무어라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들을 잃은 삶이 이전에 내가 살아왔던 삶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삶을 살아가는 거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상상만으로도 힘들었지만.
- 듄(2021): 가슴 뛰는 웅장한 거대 sf 세계관. 근데 이제 전통적인 제국주의 백인 남성 개척자와 신비로운 식민지 원주민 소녀의 이야기가 함께하는.
듄 후기
서방세계의 유구한 개척자이자 메시아인 백인 남성과 왠지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는 원주민 소녀 조합에 영적인 힘을 갖고 있는 모계의 피가 흐르는 전형적인 제국의 부계 중심 사회 잘 보고 왔습니다. 티모시는 섹시하네요.
라고 관림 직후에 썼던 후기를 다시 읽어봤다. 이 후기를 적었던 점에는 <듄>이 1984년도에 발표된 원작 소설이 따로 있는 영화라는 걸 몰랐었다. 이걸 감안하고 영화를 봤다면 다른 감상이 남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 후기와는 별개로 영화는 재밌었다. 오랜만에 본 sf 영화였고, 세계관을 구현하는 스케일에 놀랐고, 완전히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는 영화라서 철저히 관람객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화라는 점이 좋았다. 현실과 분리된 기분에서 느껴지는 조금의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있었다. 현실의 모습을 다룬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 소비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비슷한 감정이었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식민지 아라키스 행성으로 떠나고,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인 폴이 황제의 배신에 의해 가문이 몰살당하고 피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꿈속에서 보았던 아라키스의 사람들(프레멘)을 만나 각성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정을 영화에서 보여준다. 일종의 도입부 같은 느낌이다. 어머니 쪽인 베네 게세리트의 능력인 '목소리'를 이어받아 사용할 수 있고, 이 능력이 그를 '메시아'로 이끌지만 그럼에도 폴이 아버지를 이어 아트레이데스 공작이 된다는 점. 식민지 아라키스의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정복이 아니라 협력을 위해 왔다고 이야기했던 점 등등을 생각해보면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이 식민지를 약탈했던 것이 오버랩되면서 미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후속 편이 나온다면 보러 가고 싶은 영화다.
2. 시월의 드라마
- 롱 베케이션(1996): 말 그대로 Long Vacation
- キス しようか? (키스할까?)
- いいよ。(좋아.)
이 한 장면에 멱살 잡혀 보기 시작했던 롱 베케이션(롱바케).
1996년도 드라마임에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인 시월에 봤지만, 앞으로 여름이면 이 드라마가 생각날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미나미와 세나가 그리울 것 같다.
결혼식 당일 전 재산을 빌려준 신랑이 도망가는 바람에, 지낼 곳이 없어진 미나미가 신랑의 룸메이트였던 세나와 같이 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처음에는 미나미는 도망간 신랑인 아사쿠라를, 세나는 학교 후배 료코를 마음속에 품고 있어서 세나는 미나미를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미나미는 세나가 료코와 잘 될 수 있도록 응원을 해준다. 서로 잘 맞지 않아 싸우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진심으로 서로에게 위로를 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리고 미나미는 료코와 잘 되어가는 세나가, 세나는 나중에 실력 있는 사진작가인 스기사키와 잘 되어가는 미나미를 마냥 예전처럼 진심으로 웃으며 응원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싸우다 보니 경쟁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들만 내뱉고, 그런 말들에 상처를 받고 냉전을 보내다가도 어색하지만 사과를 주고받으며 또 자연스럽게 서로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둘의 관계가 너무 좋았다. 조금씩 쌓인 관계라 어느 날 문뜩 바라보면 놀랄 정도로 단단하게 쌓여있는, 무시하지 못할 큰 크기의 관계가 바로 둘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세나와 미나미 모두 완벽한 사람이 아니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갖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어서, 그들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과 서로에게 건네는 위안에 나도 힘을 받았다. 특히 세나가 미나미에게, 미나미가 세나에게 롱 베케이션. 불안한 현재를 쉬어가는 휴식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라고 말을 건네던 장면이 좋았다. 휴학을 하고 있는 나에게도 너무 필요한 말이어서.
서로의 이름을 끊임없이 외치던 마치 고백 같던 장면도, 마음을 자각하고 세나에게 달려와 키스하려고 왔다고 말하던 미나미 장면도, 이에 답하던 세나의 장면도 그리고 마지막에 함께 달려가던 둘의 장면도 모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언제 다시 꺼내봐도 늘 처음 봤을 때 느껴지던 설렘의 감각이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