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역사] 전태일로 살다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by 들무새

2011년 9월 3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소천하셨다. 향년 82세.


41년을 전태일의 어머니로,

41년을 전태일로 살았다.




너무 맑고 예쁜 아이, 작은 선녀같아서 소선이라 지었다.

독립운동하던 아버지는 세 살 때 일본군 죽창에 찔려 죽었다.

열다섯살 강제징용에 끌려가 일본군복을 만들었다.

개가한 엄마따라 간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열아홉에 결혼해 대구에서 전태일을 낳았다.

다섯 살 태일은 옷 없는 옆집 아이에게 제 옷을 벗어주는 아이였다.

열여덟 살 태일이 평화공장 시다로 취직하고 4년 뒤

지병을 앓던 남편이 사망했다. 아내 나이 마흔이었다.

그 다음 해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봤다.

화상의 고통이라도 덜어달라고 병원에 매달렸지만

화기를 빼는 주사 값이 1만 5천원

집을 팔아서라도 갚겠다는 어머니에게

의사는 근로감독관 보증을 받아오라 했고,

근로감독관은 매몰차게 뿌리쳤다.


관 좀 뜯어봐라,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자며

손톱에 피가 나도록 관을 쥐어뜯는 어머니에게

장례 치르고 노동조합 해야지요,

말리던 아들 친구들도 꺽꺽 흐느꼈다.


태일을 묻고 온 다음 날 돈뭉치를 들고 찾아온

노동청 산재사무소장의 멱살을 잡고

노조 사무실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노조결성 방해마라,

빨간 글씨로 쓴 러닝셔츠를 입고

태일의 친구들과 함께

국회 앞에서 작업복 상의를 벗었다.


그렇게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다.

1970년 11월 27일

태일이 숨진 지 2주만의 일이었다.


2주 전만해도 부쩍 수상해진 아들 걱정에

근로기준법 책을 부엌 솥단지에 감추던 엄마는

투사가 됐다.


죽어가는 아들이 남긴 유언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

모든 것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이 날 이후 41년 간

아들의 유언을 지키며 살았다.


안기부는 6000만원이 든 통장을 들고 와

빨리 장례를 치르라며 종용했고,

정권은 강남 장미아파트 입주권으로,

동대문다방 영업권으로도 회유했지만

모두 찢어버렸다.

세 번의 옥고,

180번의 구류 처분

250번이 넘는 구속수사

둘째아들 전태삼과 나란히 포승줄에 묶이기도 했다.


전태일의 정신으로 이소선의 삶을 살았고,

이소선의 실천으로 전태일의 죽음을 증명했다.


우리 시대는 두 사람의 분신과 헌신으로

노동의 가치를 외치고, 돌아봤다.

노동하는 삶이 인간다워야 할 근거를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갔다.


“당신은 당신 아들 이후의 아들이었고

당신 아들의 어머니 이후

세상의 동서남북 떠도는 어머니였”다.(고은 시인 조시 ‘당신의 죽음을 울지 않습니다’)


그는 내게도 눈물겨운 어머니였다.

전태일 평전 표지 속 당신의 얼굴

그 한 장의 사진

그 한 권의 책은

어둡고 어리던 내 정신을 깨우친 죽비이자, 세례였다.


이제 막 교과서 밖 세상을 바라 본 스무 살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살까,

생각의 방향이 나침반 바늘처럼 덜덜거리던 시절

그래도 세상을 향해 가냘픈 분노나마 품게 하고

그 분노의 방향을 얼추 잃지않고 살아온 데에는

그 시작에 오월광주의 피와 이소선의 눈물이 있었다.


사회에 나와 취재현장이나 과학계 일선에서

삶의 가치와 밥벌이가 서로 부대끼거나 비껴갈 때,

삶의 방향으로 정했던 내 마음의 바늘이 요동칠 때,


그 방향을 가리키는 일이 지루해지거나,

그 방향을 지키는 일이 남루하게 느껴질 때


내 마음의 시작을 더듬어 가다보면

거기 언제나 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의 눈물이 있었다.

그 눈물을 보며 눈물짓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다.




그러나 54년 전 전태일 열사의 절규,

그 어머니가 외친 41년 간의 호소

세상은 달라졌을까.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근로기준법 화형식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 붙은 몸으로 달리며 절규한 전태일 열사의 외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헌법 33조1항 근로 3권의 바깥에서 죽어간다.

위험은 외주화되어 산재사망자 열 명 중 아홉 명이 하청노동자이고,

파업에는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 수 백억원의 소송이 뒤따른다.

2009년 11월 8일 광화문 광장, 전국노동자대회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삽니다, 하나가 되면 이깁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부축을 받으며 외친 이소선 여사의 호소

아직도 여전히,

양대 노총의 갈등은 골이 깊다.

한쪽은 몽상가라며, 한쪽은 어용이라며 반목한다.

진보정당도 갈등의 결이 거칠다.

한편은 빛이 바랬고, 다른 한편은 너무 선명하다.

빛이 바랜 건 정당만이 아니다.

이소선 여사가 내 아들이라고 부르던 두 사람


서울대에서 전태일학생장을 치른 장기표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낸 김문수


한 사람은 정치낭인이 되어 제도권 정당 주변을 맴돌고 있고,

한 사람은 서울대 노동운동의 대부에서 반노조 막말의 대가가 되어

얼마 전 윤석열 정부의 고용노동부 장관이 됐다.




우리 가치관의 보존기한은 얼마나 될까.

한평생 아들의 유언을 지켜낸 삶이 있고,

누군가는 일찌감치 혹은 서서히 변해간다.

조용한 일요일 아침,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다시 보는 13년 전 당신의 마지막 길.

대학로 영결식에서 청계천 노제까지

하늘을 뒤덮은 82개의 만장


“노동자 총단결” “우리 모두 전태일이 되겠습니다”

“노동해방 이소선” “어머니, 태일이 만나 훨훨 춤추소서”


만장의 물결따라 가슴이 일렁인다.

저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 있을까.


전태일 평전을 다시 넘기며 그의 죽음을 생각해보고

이소선 여사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의 생애를 정리해보는데

느지막히 일어난 열세 살 막내 딸 전화가 왔다.


“아빠 어디갔어?” 잠이 덜 깬 목소리

더없이 나른하고 평화로운 그 음성을 듣다가

문득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과

그 방편으로서의 노동을 생각하다가


하루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 밖에 안되는

일당 50원을 받고 평화시장 다락방에서

시뻘건 핏덩이를 토하던

55년 전, 열두 살 여공의 목소리는 어땠을까.

순간, 가슴에서 목구멍을 타고

입 안 한가득 올라오는 무언가에 입을 틀어막는,

그래도 평화로운 우리의 일요일 아침.


* 이소선 여사의 생애는 오마이뉴스 민종덕 기자가 쓴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을 비롯한

언론 인터뷰 등의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글의 맥락에 따라 일부 문장에서 호칭을 생략한 점 양해를 구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