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교육기업, 출판사, 스타트업…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까 정말 그렇다.
과거의 난 최고의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다.
왜냐고 물으면 그게 제일 재미있었고, 또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대학원에 들어가 보니 천성에 딱이었다.
인류, 혹은 인류를 둘러싼 모든 것의 연원에 대한
시키지도 않았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자발적인 호기심.
그 역사는 현재 인간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끊임없이 생각해 보는 것.
그걸 정확한 언어로 정리해 보는 일은 물론 쉽진 않았으나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았다.
공부를 이어가지 못했던 건 진부하게도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일본에 나가 학업을 이어가고 싶단 꿈 하나로
무작정 일본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교수님들을 찾아갔다.
일면식도 없는 교수님들은 내 열정과 진심 하나만 보고 귀한 시간을 내줬지만,
자신의 젊은 한 시절을 내어 준 학업에 대해 조언해 줄 땐 열렬히 지지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만류했다.
수입 없이 공부를 이어간다는 건 웬만한 재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면 쉽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더라도
한국 학위가 아닌 이상, 학계로의 취업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 보고 싶어 일본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땄다.
그렇게 애써 결연함으로 감추었지만, 무서웠다.
혼자 살아본 적도 없는데, 혈혈단신으로 이국에 가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지지부진 결정을 못 내리는 와중에 박물관에 취업하게 됐고, 얼마 후 코로나가 터졌다.
그 뒤 코로나는 지금까지 내가 학업을 멈춘 좋은 핑계이자 명분이 됐다.
어떻게든 마음을 굳게 먹고 일본으로 가면 됐을 것을.
용기가 부족했단 사실엔 눈을 꽉 감고, 원망하기 바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갇혀 꿈을 포기하고 일을 하게 된 난, 돈이 없는 난, 너무너무 불쌍해,
라며 자기 연민에 갇힌 채 2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수년을 썼다.
그렇게 시간은 째깍째깍 잘 흘러갔다.
그동안 다양한 조직에서, 다양한 환경에서 여러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가 하고 싶은 게 진정 뭐였을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최고의 역사학자라는 건 뭘까. 왜 역사를 내 인생의 하나의 키워드로 그토록 열렬하게 가져가고 싶었을까.
어느 날 번개처럼 번쩍 답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
그 이야기 자체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지난한 일상을 먼저 살아낸 누군가의 이야기에 내 지금을 비춰보며 위안을 삼고,
내가 공명한 그 이야기를 타인에게도 잘, 정말 매력적으로 전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구나.
꿈의 맥락이 명쾌해지니까,
지금 당장의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돈(어떻게 보면 핑계일 수 있으나)과 같은
현실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답은 명쾌했다.
그냥, 어디에서든지 상황이 어떻든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든 하면 되었다.
그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내가 몸담을 곳을 찾아가면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이 순탄할 거라고, 아니 순탄해야 한다고,
제발 어떠한 현실도 날 가로막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
그저 치기였단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나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생은 조금씩 쉬워졌다.
아니, 인생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 어려운 인생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달까.
흘러 흘러, 흘러가는 모든 걸 어떻게든 붙잡고 제 뜻대로 조정하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인 듯하다.
그래서 그냥 쉽게 말하면 인생은 나 자신과의 싸움일 뿐,
혹은 나 자신을 사랑하려 애쓰는 여정일 뿐, 어찌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그저 흘러가는 것에 몸을 맡기고,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분간하며 용써보는 것.
그 과정에서 어쩔 땐 심약해지는 바람에 나를 속일 수도 있겠으나,
어떻게든 속이지 않으려 하며 정면으로 나와 부딪히는 것만이
인생을 제일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앞으로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이 유한한 여정을 끝낼 때까지
계속해서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퍼블리, 커리어리 창업자인 박소령 작가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2주에 걸쳐 다 읽었습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일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난 뭘 원하는 사람이지,
각 잡고 다시 생각해 보며 정리해 볼 수 있게 해 준 좋은 책이었어요. :)
이 글은 그 파생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