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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r 04. 2023

나만의 데미안

전시 큐레이터를 그만두었다, 알을 깨고 나왔다

나만의 데미안


  새벽 2시, 엄마가 울고 있었다. 졸린 눈꺼풀을 연신 비비며 그 옆에 섰다. 영문도 모른채 모든 잠이 달아나 버렸다. 서럽게 울고 있는 엄마를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겨우 열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실 엄마가 저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기도 했다. 달래주려고 다가가다가 멈칫, 가만히 쳐다보다가 또 멈칫.

  결국 엄마를 달래주는 것도, 자는 것도 포기한 채 그 옆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허공을 맴돌던 시야가 닿은 곳은 "셜록홈즈 단편선"이었다. 예전에 사놓고는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책이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무심코 툭 꺼내들었다.


  사건과 추리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다소 광적인 워커홀릭. 무례할 정도로 남에게 무신경한 똥 매너의 소유자.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비범하고 비상한 두뇌에 곧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명성을 얻은 그는 존경과 환대를 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절대 변치 않을 친구, 늘 왓슨이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이란 저런 것인가 싶었다. 그 날 후로 집요한 셜록홈즈 전집 도장깨기가 시작되었다.


  자아가 이제 막 형성되어갈 무렵에 누군가를 동경하게 된다는 건 무서운 것이다. 활자 속 홈즈의 일거수 일투족에 기대어 나만의 정체성을 가꾸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건 역사니까. 역사 분야에서는 홈즈 못지 않는 전문가가 된다. 생각만 해도 소름돋게 멋졌다. 책상에는 사뭇 거만한 자세로 파이프 담배를 피고있는 홈즈의 사진을 떡 하니 붙여놓고 공부의 동력으로 삼았다. 친한 친구도 딱 한 명만. 마음 속으로 찜콩한 채 두터운 우정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정말 친해졌다 싶으면 "왓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곤 했다. 나는 "햄즈"라면서. 감히 아직 "홈즈"의 레벨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아빠는 의사의 꿈을 포기했다. 성적은 좋았지만 친할머니가 고3이었을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방황을 했다고 꽤나 진한 후회를 뱉었다. 그러고는 늘 이야기했다. 꼭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포기하면 절대 안된다고. 그 말은 무서운 족쇄가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삶은 실패한 삶의 다른 이름인 것만 같았다.


  홈즈의 철학과 아빠의 회한은 절묘하게 버무려져 나의 이십대를 가름했다. 사학과가 아니면 아무 대학도 가지 않겠노라 선언한 치기어린 의무감이 뭣 모르는 나를 대학원까지 이끌었다. 힘들 때가 많았다. "문송합니다"라는 세태에 가시적인 아웃풋을 기대하기 어려운 인문학을 전공한다는 게. 정말 여러모로.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 성공할 거야, 그렇게 다시 스스로를 다잡기를 수도 없이 여러 번.  


  스물 세 살, 홈즈의 고향, 런던에서 보낸 일주일은 꿈만 같았다. 마침내 베이커가 221번지 앞에 섰을 때는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눈물이 오랜 덕심에서 비롯된 감격이었을지, 어린 나날에 깃든 스스로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며 그만 자기연민에 사로잡혀 버렸던건 아닌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른 하나, 3년 반의 전시 큐레이터로서의 이력을 접었다. 이번 이직은 나에게 크나큰 터닝포인트였다. 아니, 나에게 있어서는 큰 도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다른 분야에 도전하겠다는 건 박사 진학을 얼마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야 말겠다던, 이십 대의 나를 견인해 온 그 홈즈의 알고리즘에서 이제 그만 벗어난다는 거였으니까. 불안하고 또 불안하고, 무섭고 또 무서웠다.



  친숙한 안내자는 사라졌다. 무언가를 깨고 나왔다. 숱한 날 속에서 이제 겨우 홀로 서는 법을 알았다. 일분 일초도 예측할 수 없는 날들이, 일분 일초도 예측할 수 없는 하루가,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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